추천도서
한국출판문화진흥원 10월의 읽을 만한 책
출판문화진흥원 10월의 읽을 만한 책
바쁜 생활과 복잡한 관계에 지친 사람들에게 삶의 흐름을 생각하게 하는 단편소설집 『그 산, 그 사람, 그 개』. 중국 작가 펑젠밍이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발표한 작품 9편이 담겨있다.
고향 후난성이 배경인 작품을 주로 발표하는 펑젠밍은 1983년에 <그 산, 그 사람, 그 개>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왕복 사흘이 걸리는 200리 산길을 다니며 우편배달을 하는 아버지가 수십 년 했던 일을 아들에게 물려준다. 한 달에 한 번 밖에 집에 갈 수 없는 고되고 외로운 길을 갈 아들이 안쓰럽고, 그런 아들에게 마음 주는 처녀를 보니 또 마음이 아리다. 산길을 함께 다닌 개가 곁을 떠나지 않자 호통을 쳐서 아들에게로 보내는 과정 과정이 눈물이다. 영화로 만들어져 몬트리올영화제, 인도국제영화제 등에서 호평 받았고 그의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그 산, 그 사람, 그 개>는 도시화 과정에서 땅을 잃은 농민과 척박한 환경으로 내몰린 낙타의 모습을 아프게 그려냈다. <민초>, <배움> 등 작품집에 실린 단편들은 아련한 농촌 풍경과 변화하는 농촌현실을 담고 있다. 환경은 바뀌더라도 면면히 내려온 생명과 아름다움을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순박한 사람들의 아픔과 삶을 담은 9편의 단편소설. 어느덧 가볍고, 빠르고, 복잡하고, 잔인한 이야기에 갇힌 우리들의 마음을 씻어 주리라 믿어 권한다. 웬만해서는 진짜 시골을 만나기 힘든 대한민국. 매일 매일 바쁘고,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번잡한 세상에 이제 인공지능까지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럴 때 원시로 돌아가 느긋하게 생각하는 것도 해법을 부르는 길이리라.
레마르크가 <개선문>에서 그려낸 라비크라는 남자에게 반해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았었다. 나치의 추격을 피해 파리로 숨어든 의사 라비크. 그는 뛰어난 수술 솜씨를 가진 데다 예술에 조예가 깊고 신중하고 용기 있는 남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메스를 잡는 휴머니스트였다.
이 책을 쓴 폴 칼라니티는 라비크를 닮은 현실의 사람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알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는 신념으로 의사가 된 그는 휘트먼과 엘리엇을 입에 달고 사는 문학도이기도 하다. 환자를 대할 때 청진기보다 먼저 마음 문을 두드리는 사람, 여인과 친구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남자, 그래서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
그러나 그는 레지던트 막바지, 전공의 초빙을 앞두고 서른여섯의 나이에 폐암 말기라는 뜻밖의 선고를 받는다. 그는 한걸음씩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나는 계속 나아갈 거야.”라는 사뮈엘 베케트의 대사를 되뇌이며 죽어가는 대신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환자 치료에 열중한다. 마침내 칼을 들 수 없게 되자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사명을 펼치다가 2년여 만에 죽음을 맞이한다.
책을 추천할 때 베스트셀러로 소문난 책은 ‘나 아니어도’ 하며 슬쩍 눈을 돌리기도 하는데, 이 책만큼은 아니다. 울림이 큰 책,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따라가는데도 가슴을 데워 주고 삶의 부피를 더해 주는 역설적인 책, 우리들의 10월 서재에 이 책이 놓이기를 기대한다
조선은 초상화의 나라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숱한 초상화를 생산했다. 전투 장면이나 풍속을 담은 그림이 이웃 나라에 비해 부족한 데 비해 초상화만큼은 결코 밀리지 않았다. 이는 수기(修己) 곧 인간됨을 강조하면서 조상들의 계통을 매우 중시한 조선사회의 특성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를 알고 싶을 때 우리는 먼저 그 사람의 얼굴 사진을 본다. 초상화도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옛 사람의 초상화를 접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의 현장에 발을 디디는 것과 같다.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라는 제목에 잘 드러나듯이, 이 책은 과거 인물의 얼굴 모습을 통해 우리 역사를 되짚어본다. 역사 공부의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기에, 딱딱하거나 지루하기는커녕 책을 읽는 내내 재미가 넘친다. 초상화를 다룬다고 해서 관상 같은 ‘이상한’ 장르로 빠지지 않고, 현존하는 각종 초상화의 진위를 실증적으로 면밀하게 고증하여 설명한다. 우리 눈에 익은 이황이나 이율곡, 그리고 이순신의 초상화가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근대에 들어와 상상력으로 그려낸 표준영정이라는 ‘떨떠름한 진실’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사실적이고 객관적이다. 이뿐 아니라, 고구려 벽화나 일본 소장 초상화 등도 소중한 자료로 다룸으로써, 조선시대를 넘어 한국사 거의 전 시기를 다룰 뿐 아니라, 자료 수집도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최대한 섭렵하였다. 저자가 전문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역사 연구의 정석을 제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수준 있는 역사교양서이다. 재미까지 있으니 금상첨화다
우리는 누군가의 부고를 통해 거의 날마다 죽음을 간접경험하면서 살고 있지만 막상 실제로 죽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줄 사람은 결코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유명인사 다섯 사람의 죽음을 자세하게 파헤치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미국의 사상가 수전 손택,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존 업다이크, 영국의 천재시인 딜런 토머스, 그림책의 피카소로 불리는 모리스 센닥이 바로 논의의 대상들이다. 그들은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죽음과 대결했다. 그리고 저자는 그 과정을 너무나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을 적대시하고 그것에 정면 도전했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은 죽음이 너무 두려워 섹스에 탐닉하거나 끊임없이 술을 마셔대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결국 그들은 모두 죽었다. 우리는 이 다섯 사람들의 흥미롭고도 진지한 죽음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나의 죽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의식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책이 은연중 노리는 기획의도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바이올렛 아워(violet hour)’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빌려온 말로 아직 완전한 어둠이 내린 것은 아니지만 곧 칠흑 같은 깜깜함이 찾아올 저녁 무렵의 어느 한 때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우리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굳이 ‘바이올렛 아워’라고 표현한 숨은 의도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적어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들은 이제 죽음이란 말보다는 바이올렛 아워란 말을 더 자주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에게 아랍은 사막과 작열하는 태양, 일부다처제, 유목민, 석유, 막대한 부 등의 단어들로 설명되는 아주 멀고 신비한 세계이다.
우리는 미국과 일본과 중국 그리고 유럽과의 관계에 익숙해서 경제와 국제정치 영역에서 아랍지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잊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를 다양하고 넓게 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아랍세계의 대표격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깨뜨리고 현실적으로는 그 사회가 다양하며 전 세계가 겪는 바와 마찬가지로 급격한 사회적 변화와 정치적 긴장과 불안과 갈등 속에 있음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국가와 사회의 역동성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제공한다.
예컨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3명 중 한명은 외국인이며 총 인구의 70%가 30세 이하이고 그 중에서 60%가 20대 이하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막강한 부자나라에서 전체 국민의 40%가 놀랍게도 빈곤층이며 외국인 노동자가 90%를 차지하는 반면 20~24세 사이의 젊은이들 중 40%가 무직 상태이다. 이런 계층적 차이는 사회체제에 위협이 되고 있으며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은 점차 극단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실패한 경제정책과 낙후된 교육제도, 왕자들 사이의 갈등, 왕정체제의 한계성 등이 내부적인 위협을 만들고 있다.
독자들은 책을 읽고 아랍사회에 대한 왜곡된 상상을 깨고 사회적 다양성, 이질성, 취약성 등, 현실을 심층적이고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호사가들의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현지 특파원 경력 30여 년의 기자가 심층 조사를 통해 실질적인 정보와 지식, 짜임새 있는 서술로써 우리에게 유익한 지역적 이해의 시야를 넓혀준다.
전통적으로 문화 특수적 관점과 문화 보편적 관점은 문화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다. 문화에 대한 특수성을 인정하고 개별 문화의 내부적 시각에서 설명하는가 혹은 보편성을 수용하고 외부적 시각에서 해석하는가 하는 부분은 여러 분야에서, 여러 모양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 책은 저자의 전작인 <컬처 코드>가 담아냈던 “우리가 속한 문화를 통해 특정한 대상-자동차와 음식, 관계, 나라 등-에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의미”(6쪽)로서의 문화 특수적 관점과 달리, 문화 보편적 관점에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이 깊은 감정적인 차원에서 공감하는 공통적인 무의식적 구조”(21-22쪽) 즉, 글로벌 코드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일 저자가 단순히 시차를 두고, 두 가지 다른 흐름에서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전작 이후 변화된 트렌드 혹은 기존에도 움직임은 있었지만 분명하지는 않았던 트렌드인 글로벌 부족(글로마드)의 형성 그리고 그로 인한 글로벌 코드의 등장과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문화 보편성의 구체적 특성인 글로벌 코드를 논하고 있다.
책은 글로벌 부족, 도시국가, 이동, 아름다움, 고급문화, 쾌락, 안전, 변화와 적응, 리더십, 교육, 밀레니얼 세대, U곡선 등 12개 코드와 그에 대한 공감과 통찰을 제공하는 다양한 접근과 사례를 적절하게 분류하여 제시함으로써 글로벌 코드라는 거대한 화두를 부담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책은 공적인 비즈니스부터 사적인 여행 등의 분야에 이르기까지, ‘글로벌’이라는 단어와 현상에 익숙하지만 이 시대‘글로벌’의 보이지 않는 의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새롭고 흥미로운 보편성을 보여줄 것이다.
고향 후난성이 배경인 작품을 주로 발표하는 펑젠밍은 1983년에 <그 산, 그 사람, 그 개>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왕복 사흘이 걸리는 200리 산길을 다니며 우편배달을 하는 아버지가 수십 년 했던 일을 아들에게 물려준다. 한 달에 한 번 밖에 집에 갈 수 없는 고되고 외로운 길을 갈 아들이 안쓰럽고, 그런 아들에게 마음 주는 처녀를 보니 또 마음이 아리다. 산길을 함께 다닌 개가 곁을 떠나지 않자 호통을 쳐서 아들에게로 보내는 과정 과정이 눈물이다. 영화로 만들어져 몬트리올영화제, 인도국제영화제 등에서 호평 받았고 그의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그 산, 그 사람, 그 개>는 도시화 과정에서 땅을 잃은 농민과 척박한 환경으로 내몰린 낙타의 모습을 아프게 그려냈다. <민초>, <배움> 등 작품집에 실린 단편들은 아련한 농촌 풍경과 변화하는 농촌현실을 담고 있다. 환경은 바뀌더라도 면면히 내려온 생명과 아름다움을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순박한 사람들의 아픔과 삶을 담은 9편의 단편소설. 어느덧 가볍고, 빠르고, 복잡하고, 잔인한 이야기에 갇힌 우리들의 마음을 씻어 주리라 믿어 권한다. 웬만해서는 진짜 시골을 만나기 힘든 대한민국. 매일 매일 바쁘고,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번잡한 세상에 이제 인공지능까지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럴 때 원시로 돌아가 느긋하게 생각하는 것도 해법을 부르는 길이리라.
레마르크가 <개선문>에서 그려낸 라비크라는 남자에게 반해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았었다. 나치의 추격을 피해 파리로 숨어든 의사 라비크. 그는 뛰어난 수술 솜씨를 가진 데다 예술에 조예가 깊고 신중하고 용기 있는 남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메스를 잡는 휴머니스트였다.
이 책을 쓴 폴 칼라니티는 라비크를 닮은 현실의 사람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알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는 신념으로 의사가 된 그는 휘트먼과 엘리엇을 입에 달고 사는 문학도이기도 하다. 환자를 대할 때 청진기보다 먼저 마음 문을 두드리는 사람, 여인과 친구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남자, 그래서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
그러나 그는 레지던트 막바지, 전공의 초빙을 앞두고 서른여섯의 나이에 폐암 말기라는 뜻밖의 선고를 받는다. 그는 한걸음씩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나는 계속 나아갈 거야.”라는 사뮈엘 베케트의 대사를 되뇌이며 죽어가는 대신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환자 치료에 열중한다. 마침내 칼을 들 수 없게 되자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사명을 펼치다가 2년여 만에 죽음을 맞이한다.
책을 추천할 때 베스트셀러로 소문난 책은 ‘나 아니어도’ 하며 슬쩍 눈을 돌리기도 하는데, 이 책만큼은 아니다. 울림이 큰 책,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따라가는데도 가슴을 데워 주고 삶의 부피를 더해 주는 역설적인 책, 우리들의 10월 서재에 이 책이 놓이기를 기대한다
조선은 초상화의 나라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숱한 초상화를 생산했다. 전투 장면이나 풍속을 담은 그림이 이웃 나라에 비해 부족한 데 비해 초상화만큼은 결코 밀리지 않았다. 이는 수기(修己) 곧 인간됨을 강조하면서 조상들의 계통을 매우 중시한 조선사회의 특성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를 알고 싶을 때 우리는 먼저 그 사람의 얼굴 사진을 본다. 초상화도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옛 사람의 초상화를 접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의 현장에 발을 디디는 것과 같다.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라는 제목에 잘 드러나듯이, 이 책은 과거 인물의 얼굴 모습을 통해 우리 역사를 되짚어본다. 역사 공부의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기에, 딱딱하거나 지루하기는커녕 책을 읽는 내내 재미가 넘친다. 초상화를 다룬다고 해서 관상 같은 ‘이상한’ 장르로 빠지지 않고, 현존하는 각종 초상화의 진위를 실증적으로 면밀하게 고증하여 설명한다. 우리 눈에 익은 이황이나 이율곡, 그리고 이순신의 초상화가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근대에 들어와 상상력으로 그려낸 표준영정이라는 ‘떨떠름한 진실’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사실적이고 객관적이다. 이뿐 아니라, 고구려 벽화나 일본 소장 초상화 등도 소중한 자료로 다룸으로써, 조선시대를 넘어 한국사 거의 전 시기를 다룰 뿐 아니라, 자료 수집도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최대한 섭렵하였다. 저자가 전문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역사 연구의 정석을 제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수준 있는 역사교양서이다. 재미까지 있으니 금상첨화다
우리는 누군가의 부고를 통해 거의 날마다 죽음을 간접경험하면서 살고 있지만 막상 실제로 죽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줄 사람은 결코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유명인사 다섯 사람의 죽음을 자세하게 파헤치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미국의 사상가 수전 손택,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존 업다이크, 영국의 천재시인 딜런 토머스, 그림책의 피카소로 불리는 모리스 센닥이 바로 논의의 대상들이다. 그들은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죽음과 대결했다. 그리고 저자는 그 과정을 너무나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을 적대시하고 그것에 정면 도전했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은 죽음이 너무 두려워 섹스에 탐닉하거나 끊임없이 술을 마셔대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결국 그들은 모두 죽었다. 우리는 이 다섯 사람들의 흥미롭고도 진지한 죽음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나의 죽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의식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책이 은연중 노리는 기획의도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바이올렛 아워(violet hour)’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빌려온 말로 아직 완전한 어둠이 내린 것은 아니지만 곧 칠흑 같은 깜깜함이 찾아올 저녁 무렵의 어느 한 때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우리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굳이 ‘바이올렛 아워’라고 표현한 숨은 의도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적어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들은 이제 죽음이란 말보다는 바이올렛 아워란 말을 더 자주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에게 아랍은 사막과 작열하는 태양, 일부다처제, 유목민, 석유, 막대한 부 등의 단어들로 설명되는 아주 멀고 신비한 세계이다.
우리는 미국과 일본과 중국 그리고 유럽과의 관계에 익숙해서 경제와 국제정치 영역에서 아랍지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잊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를 다양하고 넓게 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아랍세계의 대표격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깨뜨리고 현실적으로는 그 사회가 다양하며 전 세계가 겪는 바와 마찬가지로 급격한 사회적 변화와 정치적 긴장과 불안과 갈등 속에 있음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국가와 사회의 역동성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제공한다.
예컨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3명 중 한명은 외국인이며 총 인구의 70%가 30세 이하이고 그 중에서 60%가 20대 이하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막강한 부자나라에서 전체 국민의 40%가 놀랍게도 빈곤층이며 외국인 노동자가 90%를 차지하는 반면 20~24세 사이의 젊은이들 중 40%가 무직 상태이다. 이런 계층적 차이는 사회체제에 위협이 되고 있으며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은 점차 극단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실패한 경제정책과 낙후된 교육제도, 왕자들 사이의 갈등, 왕정체제의 한계성 등이 내부적인 위협을 만들고 있다.
독자들은 책을 읽고 아랍사회에 대한 왜곡된 상상을 깨고 사회적 다양성, 이질성, 취약성 등, 현실을 심층적이고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호사가들의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현지 특파원 경력 30여 년의 기자가 심층 조사를 통해 실질적인 정보와 지식, 짜임새 있는 서술로써 우리에게 유익한 지역적 이해의 시야를 넓혀준다.
전통적으로 문화 특수적 관점과 문화 보편적 관점은 문화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다. 문화에 대한 특수성을 인정하고 개별 문화의 내부적 시각에서 설명하는가 혹은 보편성을 수용하고 외부적 시각에서 해석하는가 하는 부분은 여러 분야에서, 여러 모양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 책은 저자의 전작인 <컬처 코드>가 담아냈던 “우리가 속한 문화를 통해 특정한 대상-자동차와 음식, 관계, 나라 등-에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의미”(6쪽)로서의 문화 특수적 관점과 달리, 문화 보편적 관점에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이 깊은 감정적인 차원에서 공감하는 공통적인 무의식적 구조”(21-22쪽) 즉, 글로벌 코드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일 저자가 단순히 시차를 두고, 두 가지 다른 흐름에서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전작 이후 변화된 트렌드 혹은 기존에도 움직임은 있었지만 분명하지는 않았던 트렌드인 글로벌 부족(글로마드)의 형성 그리고 그로 인한 글로벌 코드의 등장과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문화 보편성의 구체적 특성인 글로벌 코드를 논하고 있다.
책은 글로벌 부족, 도시국가, 이동, 아름다움, 고급문화, 쾌락, 안전, 변화와 적응, 리더십, 교육, 밀레니얼 세대, U곡선 등 12개 코드와 그에 대한 공감과 통찰을 제공하는 다양한 접근과 사례를 적절하게 분류하여 제시함으로써 글로벌 코드라는 거대한 화두를 부담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책은 공적인 비즈니스부터 사적인 여행 등의 분야에 이르기까지, ‘글로벌’이라는 단어와 현상에 익숙하지만 이 시대‘글로벌’의 보이지 않는 의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새롭고 흥미로운 보편성을 보여줄 것이다.
2012년 『어메이징 그래비티』가 세상에 나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이 외국 교양만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는 한국인 조진호였다. 이 책은 한국일보가 주관하는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하였고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가 선정하는 ‘올해의 과학책’이었다. 당연히 과학자들은 조진호가 물리학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민족사관고등학교에서 다양한 생물 강의를 개설한 생물 교사였다. 그 사실이 알려진 후 과학자들은 곧 엄청난 생물학 교양만화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게놈 익스프레스』는 단순히 유전자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슈뢰딩거에 이르는 학자들이 생명의 정체와 생명 정보의 흐름에 대해 어떤 질문을 했고 물리학자와 생물학자들이 그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을 찾았는지를 보여준다. 다윈과 멘델 이후 과학자들이 유전자를 이해하고 생명의 비밀을 밝혔다고 생각하는 순간 유전자는 그들의 손아귀를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유전자는 자그마치 100년 동안 과학자들과 숨박꼭질을 했다.
조진호는 과학은 정보가 아니라 질문이며, 효율이 아니라 태도임을 역사를 통해 알려준다. 이 책은 유전자에 대한 해설서이면서 과학의 역사와 철학에 통찰을 제공한다. 교사와 과학자들이 반드시 ‘끝까지’ 읽어야 할 책이다. 만약에 청소년이 이 책을 읽는다면 그들은 선배 과학자들보다 적어도 30년 젊은 나이에 핵심적인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게놈 익스프레스』는 일대 사건이다. 대한민국의 과학책 가운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나온다면 단언컨대 이 책이 가장 먼저다.
부모란 어렵다.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늘 새로운 도전과제 천지다. 부모가 일이라면 자녀양육만큼 극한 직업도 없을 터다. 자녀기능 중 노후의탁의 보험역할이 사라진 지금은 더 그렇다. 종족번성과 단기재롱의 효능을 빼면 꽤 밑지는 장사다. 다만 출산·양육은 본능문제다. 살림살이가 팍팍해진 요즘이야 자녀출산이 선택카드로 부각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낳고 싶은 건 본능이다.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연기와 포기로 구분될 뿐이다. 그럼에도 주변사례를 보건대, 부모 되기는 넘기 힘든 허들이다. 잘 키우는지 물으면 열에 아홉은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다. 책은 해보지 못한 양육경험 앞에서 서툴게 방황 중인 이 시대 부모를 위해 기획됐다. 부모라면 누구든 고민하는 아이의 환경·정신·마음과 관련된 22가지 키워드를 막연한 감이 아닌 이론·실험·과학적인 논리 근거로 조목조목 쉽게 설명해준다. 어디서 봤을까 싶은 다방면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며 설득력을 높인다.
책은 완벽한 부모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완벽한 부모라는 세뇌는 죄책감과 무력감만 남기는 폭력에 가깝기에 과감하게 버리라 조언한다. 육아를 집안일보다 힘들게 느끼는 부모라면 그 부정적인 영향은 결국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달돼서다. 때문에 실수하되 노력하며 위로하는 자세가 대안이다. 아이의 극심한 스트레스도 실은 부모의 과욕 탓임을 과학적으로 경고한다. 행동요령도 있다. 가령 2세 이하라면 무조건 스크린과 떼어놓고, 게임은 부모와 함께 하라는 식이다. 내 아이를 잘 알고 싶다면 일독이 아깝잖다.
가로로 긴 데다 위로 넘기게 되어 있는 판형. 형식이 꽤 실험적으로 예사롭지 않아 보이지만, 내용은 예스러울 듯하다. 얌전한 서체의 세로글씨 제목, 포근하고 넉넉한 하얀 여백에 정갈하고 부드러운 단색의 소박한 동네 모습. 딱 세 군데의 옅은 오렌지 색조가 반짝 뜬 눈처럼 표정을 만든다. 이 책은 이렇게, 예스러운 것을 예사롭지 않게, 상큼한 표정과 함께 보여준다.
예스러운 것은 <나의 작은 집>이다. 작가가 작업실로 쓰던 집. ‘어느 날 문득’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이 궁금해진 작가는 집의 과거를 더듬는다. 처음에는 카센터. 그 옛 시절의 흔적은 포니나 코로나 같은 자동차 이름뿐 아니라 ‘카- 센타’, ‘빵구’같은 옛날 용어, 옥상을 둘러싼 가시철망 같은 디테일에서 깨알처럼 쏟아진다. 자질구레한 공구들과 자동차 부품, 심지어 벽에 붙은 자동차 광고 포스터들은 또 어떻고! 꼼꼼한 그림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데, 자칫 독자들을 허우적거리게 할 수도 있는 홍수 같은 디테일들이 너무나 정갈하고 담백하게 정돈되어 있는 화면 구성은 더욱 감탄스럽다.
마치 조그만 흑백사진들이 조르르 붙어 있는 옛날 사진첩을 보는 듯한 이 책은, 그 사진들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이야기도 함께 듣는 것 같다. 카-센타 아저씨의 꿈이, 사진사 아저씨의 예술혼이, 길고양이 할머니의 넉넉한 품이, 모자 가게 청년들의 흥이, 실개천처럼 지즐대며 흘러나온다. 주인이 바뀔 때마다 표정이 바뀌는 이 작은 집은, ‘오랫동안 누구의 집도 아니’었을 때에도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다. 그 오래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 이렇게 포근한 그림으로 보여주고 들려주며 전해준 작가를 만났으니, 집은 분명 행복할 것이다. 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 만큼 우리도 집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새로운 각성을 하나 얻었다.
아들이 서너 살 무렵, 가족 여행을 할 때면 아이의 등쌀에 각지의 공룡 박물관, 전시관, 체험관을 꼭 들렀다. 그럴 때마다 집에는 이런 저런 공룡 모형이 여기 저기 나뒹굴었다. 덕분에 나도‘티라노사우루스’니‘트리케라톱스’ 같은 공룡 이름을 알게는 됐지만 아들이 왜 이렇게 공룡을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던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공룡과 멀어지는 것을 보고는 또 한 번 궁금해졌다. 왜 아이들이 자라면 우리 어른들처럼 공룡에서 멀어질까?
목보다 이름이 더 길 것 같은 초식 공룡 ‘목을길게뻗으면구름에이마가닿을락말락해서비오는날몹시불편할만큼목이긴사우르스 미르’는 빙하기 때문에 알들이 더 이상 깨어나지 않아 혼자 지낸다. 형도, 누나도, 친구도 없어서 늘 심심하던 미르는 마을을 벗어나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눈사태를 만나고 ‘쥐라나뭐라나 잘남’씨라는 쥐 아줌마와 다른 일곱 마리 쥐와 함께 집을 찾아온다. 도중에 육식 공룡의 거짓말에 속아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친구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다시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야 하지만 미르는 이제 심심하지 않다. 작지만 공룡이 아닌 친구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공룡을 좋아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어린 왕자’의 말처럼…. 그래서 공룡에서 멀어지는 것은 그만큼 순수함을 잃고 눈에 보이는, 물질로 가득한 현실에 함몰되는 것이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작은 것이 더 소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단언하건대 이 작품을 읽는 아이들은 아직도 내가 다 외우지 못한 주인공 미르의 긴 이름을 금방 외울 것이다. 그만큼 맑으니까.
기사참고 : 출판문화진흥원 http://www.kpip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