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도서
9월 이달의 읽을 만한 책
한국출판문화진흥원 9월 이달의 읽을 만한 책
화려한 책이다. 생생한 음악이 흐르고, 그림이 빛을 발하고, 영화의 장면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음악가와 그의 시대를 집약한 음반 디자인의 미학은 특별 보너스다. ‘문사철(文史哲)과 인본주의라는 앵글로 음악에 접근하고자’했던 지은이의 의도는 성공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맞춤한 글 한 편 한 편에 역사와 문화와 음악가의 면모가 충실하게 담겨 있다.
이 책은 <더 클래식> 3부작 가운데 세 번째 책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에 16명의 작곡가가 만든 33곡을 다루고 있다. 앞의 두 책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음악을 주로 다루었는데, 이 책에는 프랑스의 사티,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체코의 야나체크, 스페인의 파야, 러시아의 프로코피에프, 미국의 거슈인, 아르헨티나의 피아졸라 등 다양한 나라의 음악가와 다채로운 음악 장르가 등장한다.
사티가 1893년에 작곡한 <벡사시옹>의 악보는 딱 한 페이지. 그런데 ‘이 모티브를 진지하고 부담스러운 자세로 840번 반복하라’는 지시가 붙어 있다. 이 기상천외한 음악은 1963년, 드디어 존 케이지의 도전으로 초연된다. 탱고는 밥벌이일 뿐이라며 클래식에 대한 열등감에 괴로워하던 피아졸라는 스승 나디아 불랑제의 ‘탱고야말로 너의 음악’이라는 일갈에 정신이 번쩍 든다. 밀란 쿤데라는 야나체크의 음악을 자신의 ‘미학적 유전자’라고 공언하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각색한 영화 <프라하의 봄>에 그의 피아노 곡을 추천한다.
음악과 더불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소살소살 들려주는 책, 쉽다, 재미있다, 그리고 충분히 지적(知的)이다.
추천자 : 강옥순(한국고전번역원 출판부 책임연구원)
누가 나에게 글쓰기 관련 책을 추천하라고 하면, 주저 없이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글쓰기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지침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중요한 값어치는, 글쓰기 습관을 체득하는 데서 시작해 존재의 근원을 깊이 파고드는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창조적인 글쓰기를 위한 실용적인 조언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이 책에는 우리 귀에 익숙한 최고의 작가들, 즉, 오르한 파묵, 파울로 코엘료, 토니 모리슨 등이 쓴 빼어난 인용문이 예시로 넘쳐난다. 그들의 문장 하나하나와 저자의 친절한 설명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이는 곧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상상력 넘치는 글쓰기 연습문제는 다른 글쓰기 책과의 확실한 차별성을 보여주며, 글쓰기에 대한 매력과 고민을 동시에 찾아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렇게 책을 학습하다 보면, 자신의 몸 깊숙이 잠재해 있던 글쓰기에 대한 가능성과 자신감이 저절로 유발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또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글쓰기 팁과 체크리스트는 초보자가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사전에 알려주는 등대 역할을 해준다.
책의 구성을 보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초보자에게 글 쓰는 삶의 첫걸음이자 토대인‘일기 쓰기’에서 출발해,‘퍼스널에세이 쓰기’‘오피니언에세이와 여행 에세이 쓰기’‘단편소설과 초단편소설 쓰기’‘동화쓰기’‘시적 산문과 산문시 쓰기’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글쓰기에 대한 조언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몇 가지 이유로 나는 이 책을 책상에 놓아두고 수시로 펼쳐보
기로 했다. 이제 가을이다. 누구나 시인이 되고 싶고 작가가 되고 싶은 계절이다. 더 늦기 전에, 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영혼을 일깨우는 시간을 찾았으면 좋겠다
추천자 : 오석륜(시인, 인덕대 일본어과 교수)
조선은 문치 국가였다. 고려 때와는 달리 무과시험을 정식으로 시행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문무양반의 균형을 잡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문(文)이 무(武)보다 훨씬 더 우위를 점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조선시대 무인들이 사용한 각종 무기와 장비 및 그 활용법에 대해서 우리 현대인은 잘 모른다. 기록들이 파편적으로 남아있어 구체적으로 종합하기 쉽지 않은 탓도 있지만, 문보다 무를 천시한 조선시대의 잔영이 현대 한국사회에까지 길게 드리운 탓도 무시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 특히 인기가 높은 각종 사극 드라마와 영화에 보이는 무장한 무인의 모습과 전투 장면에는 엉성하다 못해 완전히 엉터리라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 책은 바로 조선시대 무인들의 모든 것을 꼼꼼하게 고증하고, 사극에 나타난 각종 오류들을 매우 흥미롭게 지적한다. 일단의 군병을 거느린 장수가 단기(單騎)로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자살행위를 넘어 ‘미친’ 짓일 것이다. 그런데도 사극에서 이런 장면을 보기는 어렵지 않다. 적진의 중앙을 깨뜨리기 위해 돌진해 들어간 기병대가 정작 적군과 격돌할 때는 모두 말에서 내려 단검으로 싸운다면, 이 또한 기절초풍할 일이다. 그런데 역시 이런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책은 무예를 역사적으로 고증할 뿐 아니라, 그것을 사극과 흥미롭게 엮음으로써, 전문적 학술과 사회적 필요와 대중적 흥미를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수작이다. 책을 한 번 손에 잡으면 순식간에 완독할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유익하다. 박사학위를 받고 마상무예를 몸소 익힌 저자이기에 책의 신뢰도도 높다.
추천자 : 계승범(서강대 사학과 교수)
최고의 여행이란 어떤 것일까? 텔레비전에서 소개하는 멋진 경치와 문화재가 있는 곳을 돈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 있게 다녀오는 것일까? 아니면 남들이 거의 가보지 않은 오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탐험하듯 정복하는 데서 용기와 도전정신을 발휘하는 것일까? 행복하고 의미 있는 여행을 위해서는 무엇을 따져보고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이 책은 여행하는 심리학자이자 심리를 연구하는 여행가인 저자가 심리학 이론과 자신의 풍부한 체험을 바탕으로 최고의 여행을 위한 조건과 기술에 대해 안내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접근과 회피라는 심리적 동기 사이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여행의 효과를 긍정적 정서, 삶의 만족, 관계 향상, 정서지능, 문화지능, 자아 발견으로 설명한다. 성격심리학에서 성격을 설명하는 내-외향성, 개방성, 성실성, 우호성, 신경증 성향이라는 다섯 가지 요인으로 여행자로서의 자신의 성격을 분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여행이라는 활동이 가지는 요소들을 세 부류로 묶어, 음식, 기후, 경치와 같은 기본 요소와 위생, 안전과 같은 불만족 요소, 그리고 역사 유적, 액티비티, 사교적 활동, 쇼핑 등과 같은 테마 요소로 나눈다. 이 세 종류의 요소로 우리는 여행을 계획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여행자의 심리적 상태를 망치는 세 가지 요소로 분노, 공포, 혐오를 제시하고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들로 날씨, 음식, 풍경, 숙소, 여행 친구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최고의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여행자 자신의 성격, 취향, 가치뿐 아니라 여행 자체의 요소를 분석하고 이에 맞게 어떤 여행을 할지 먼저 결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러한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분석에 더해 이 책이 가지는 또 하나의 장점은, 이 책에서 말하는 여행의 기술이 탁상공론이 아니라 철저하게 체험에 바탕하고 있고 구체적인 예를 통해 우리를 설득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추천자 : 이진남(강원대 철학과 교수)
아시아인은 18세기를 지나면서 처음으로 황인종이라 불리어졌다. 그 전까지 서양인들은 아시아인들이 자기들과 같은 백색 인종이라고 묘사하였다. 이는 곧 피부 색깔에 의한 인종분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행위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서양인들은 아시아인들을 그들과 다른 인종으로 분류하였을까? 또한 왜 피부의 색깔로써 인류를 나누고 품성, 인격, 성격, 지능, 감성의 차별화를 꾀하는 행위가 일어났을까? 왜 그들은 아시아인의 피부색깔을 황색이라고 표현할까? 다양한 색깔로 사람들을 분류하고 인종적 차이에 대한 상상의 지식을 부여한 것은 서구인들이 자기들의 우월성과 타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자기 발명 혹은 자기 재조의 일이었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핀란드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을 휩쓸고 간 흉노족과 몽골족에 대한 공포와 증오의 역사적 기억은 마침내 황색인종의 발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다시 중국과 일본에 이르는 동아시아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인이 스스로 황인종을 자기정체성의 단어로 삼았음에 비하여 일본인은 황색과 백색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결국 피부를 색깔로 표현하고 그것으로써 인종을 분류한 것은 인류 역사상 극히 최근의 일이며 과학적인 진실이 아니라 인위적인 발명품이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색깔이 인종의 재조와 이에 대한 허구적 과학을 위하여 이용되는 것을 간파하게 된다. 서구인들은 동아시아가 우월할 때에는 자기들과 같은 백인종으로 여겼지만 그 진보와 발전이 정체되었을 때는 황인종이라는 발명을 통하여 분리했던 것이다. 동시에 중국인이건 일본인이건 각각 자기 입장에서 유리하게 색깔론을 이용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이 책은 피부 색깔의 정치적 이용의 맥락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추천자 : 김광억(서울대 명예교수)
‘기승전 치킨집’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문과 혹은 이과, 전공, 과거와 현재 직장 또는 직업에 상관없이 결국 마지막은 치킨집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결말로서 선택한 자영업에서도 성공은 언감생심이고, 살아남기도 여의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비단 자영업으로 분류되는 영역만이 아니라 나름의 기술, 상품, 서비스를 생산, 제공하는 기업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창업’이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창업에 대한 관심과 범국가적 차원의 창업에 대한 지원은 계속 확대될 것으로 보이고, 엄밀히 말하면 사업의 시작을 의미하는 창업이 어렵다기보다 사업을 유지하고 성장시키기가 어렵다는 게 정확한 것 같다. 책은 사업유지‧성장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인을 오랜 기간의 추적조사 자료를 통해 밝히고 있다. 창업자정신(The Founder’s Mentality)으로 명명한 지속 가능 성장의 열쇠는 반역적 사명의식(An insurgent mission), 현장 중시(Front-line obsession), 주인의식(Owner’s mindset)이다.
책은 이러한 결정적 특성이 성장에 따른 세 가지 위기인 과부하, 속도 저하, 자유 낙하 상황에서 어떻게 조장되고, 발휘되는지를 다양한 자료와 사례를 통해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특히 사업성패 즉, 사업 유지‧성장의 성패를 결정하는 핵심요인으로 흔히 지목하는 외부적 요인보다, 창업자정신으로 칭한 내부적 요인의 관점에서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사업성패의 결과에 대한 ‘통제 가능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창업자정신 요소 자체의 신선함보다 이를 어떻게 조직에 심어 내고, 이끌어내는가 하는 지점에 대한 여러 실제적 사례와 설명은 귀 기울일 만 하다. 각자의 자리에서 향후 지속가능한 사업을 꿈꾸는 이들과 어려운 현실 속에 사업을 운영 중인 사람들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추천자 : 이준호(호서대 경영학부 교수)
자연사 연구에 기여한 다양한 인물들을 폭넓고 상세하게 다룬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리니우스부터 시작하여 다윈, 훔볼트, 카슨에 이르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인물들만이 아니다. 이 책은 그들의 명성에 가려져 있었거나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자연사라는 건축물의 튼튼한 기초와 굵은 기둥을 세우는 데 나름대로 한몫을 한 수많은 인물들까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러면서 틀린 점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측면에서 자연의 모습을 꿰뚫어본 혜안을 보였다고 꼼꼼하게 평을 한다. 많은 학자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라거나 “암흑기였다”라고 한 마디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중세시대에도 나름대로 자연사에 기여한 인물들이 있었다고 밝히기도 한다. 또 전쟁과 논쟁, 시대 분위기 등 당시의 역사도 곁들여서 린네와 베이츠 같은 인물들이 왜 그 시대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설명한다. 각 연구자의 접근법이 어떤 특징이 있고 후대에 어떤 영향이나 악영향을 미쳤는지도 말해준다. 자연을 연구하는 이가 남들에게 하찮아 보이는 것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건네듯이, 저자는 그 시선을 잊힌 자연사학자 한 명 한 명에게로 향한다. 이 세심함에 힘입어서, 몇몇 유명 인물에게만 초점을 맞추었을 때 놓치기 쉬운 자연사 연구의 역사가 환히 드러난다. 자연사 분야는 1950년대 이후로 분자생물학 같은 활기 넘치는 분야들에 떠밀려서 점점 찬밥 신세가 되었다가 최근에야 서서히 회복되는 중이다. 자연사 연구의 역사를 훑은 이 책은 최근에 자연사 전체가 얼마나 낯선 분야가 되었는지, 즉 우리가 생태학 같은 과학이 말하는 자연 자체에 얼마나 소홀해졌는지를 일깨우는 역할도 한다. 직접 자연을 관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새삼 되새기게 한다. 덧붙이자면, 저자의 시각이 마음에 안 든다고, 직접 알아보겠다고 자연으로 나서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는 저자의 바람이 실현되기를 응원한다.
추천자 : 이한음(과학 전문 저술 및 번역가)
고도성장기의 최대덕목은 근면·성실이었다. 열심히 내달리면 그걸로 족했다. 운까지 붙으면 성공신화에도 쉽게 이름을 올렸다. 100m 결승전처럼 모세혈관의 작은 에너지마저 한껏 뽑아내 전력질주하자는 분위기가 압도했었다. 넘어져도 초인적 극복기제가 당연시됐다. 2016년 대한민국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더는 아니다. 성장은 멈췄고 활력은 줄었다. 뛰어본들 손에 쥘 게 별로다. 회사도 사회도 패러다임 전환의 거대장벽 앞에서 방황 중이다. 제한된 자본·노동으로 부가가치를 더 키워야함에도 속 시원한 해법은 없다. 생산성을 높여야하는 만큼 피로감만 누적된다. 대체 가능한 방향은 혁신적 사고와 창조적 수단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없는 길을 만들어야 할 운명이다.
문제는 첫걸음이다. 책은 휴식을 대안으로 내놓는다. 혁신과 창조가 근면과 성실로 담보되지 않듯 내려놓고 쉴 때 새로운 길이 열린다 말한다. 비워야 담아내듯 일하지 않을 때 더 큰 성과가 나온다는 도발적 문제제기다. 멍 때리기가 기억력과 학습동기를 높인다는 연구결과를 보건대 낭설은 아닌 듯하다. 더구나 저자는 과학전문기자로 책을 관통하는 다양한 논리근거를 반복한다. 현명한 포기가 의외의 선물을 안겨주기에 시간에 쫓길수록 맘 놓고 쉬라 제안한다. 책에 따르면 낮잠도 명상도 산책도 좋다. 아이작 뉴턴도 존 레넌도 쉴 때 성과를 냈다. 휴식은 낭비가 아니다. 꼭 필요한 것에 주목하고 집중하는 마음가짐이자 생각방법이다. 속도지향적인 정보홍수는 함정이다. 인생사 본질은 결코 바쁨에서 찾아질 수 없다. 자칫 놓치는 것만 늘어난다. 휴식이 나를 찾아준다면 쉬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추천자 : 전영수(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이렇게 시원한 책을, 더위 다 가신 뒤에 추천하게 된 것이 아쉽다. 한여름 폭염에 펼쳐들면 낄낄대면서 더위를 조금이라도 물리칠 수 있었을 텐데!
술 취한 아빠가 아들 주려고 사온 커다란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들여놓은 뒤 문을 열어놓은 채 가 버린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현실에서 이런 상황이라면 아빠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책할 것이고, 엄마는 흥건해진 냉장고를 치우면서 소리를 바락 지를 것이고, 아들은 으아앙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하지만 그림책은 너무나 너그러운 장르다. 실수와 짜증과 실망까지도 감싸 안아 한바탕 흥겨운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다.
비결은, 표지에서 귀띔해주듯, 냉장고 속 작은 음식들이다. 요구르트며 쿠키며 딸기 들은 통통 튀는 아이처럼, 우유며 카스텔라들은 품 넓은 어른처럼 그려지는데, 이들이 힘을 합쳐 녹아가는 아이스크림을 근사한 아이스크림 케이크로 되살려내는 것이다. 이 과정이 어찌나 흥겹고 유머러스하면서 생생하게 펼쳐지는지, 나도 이런 아이들을 냉장고에 넣어 놓은 뒤 지켜보고 싶어질 정도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망했다 싶은 상황이 놀랍게 반전되는 희망이 읽힌다. 작은 것들도 힘을 합하면 뭔가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격려도 읽힌다. 그저 먹히는 것만이 운명인 음식물들이지만 주체적으로 창의성을 발휘해 근사한 작품으로서 먹힐 수 있다는 자부심도 읽힌다. 그렇게 먹히면 뭐가 더 나은 걸까? 물론, 훨씬 낫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 아니더라도 이 그림책은 정말 즐겁다. 스토리뿐만 아니라 캐릭터 하나하나의 표정과 자세와 행동, 거기서 나오는 성격들이 어쩌면 이렇게 개성과 활기에 넘치는지. 의성어, 의태어를 적절히 활용한 탄력 있는 글도 그림과 잘 어울린다.
추천자 : 김서정(중앙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개’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속담이나 관용구는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속담은 좀 예외적이다. 놀고 있는 개가 부럽다는 뜻으로, 일이 분주하거나 고생스러울 때 넋두리로 하는 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현지는 남을 이기는 법만 배운 아이다. 전학을 온 민석이 때문에 1등에서 밀려나자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1등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힘들어 한다.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집에서 기르는 반려견 밀키가 부럽기만 한다. 학원에 갈 필요도 없고, 집에서 온종일 놀고, 먹고, 빈둥거리기만 하는 밀키가 현지의 눈에는 ‘개 팔자가 상팔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현지는 학급 아이들의 소망을 적는 소망 나무에 ‘개가 되고 싶어요.’라고 적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자신이 정말 개가 되어 있었다. 한편 현지네 가족이 키우는 반려견 밀키는 보통 개가 아니라 한글을 읽을 줄 아는 개다. 그래서 현지의 비밀 일기장도 몰래 읽고 현지의 고민도 이해한다. 이 밀키가 어느 날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개껌을 씹었더니 정말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과 개가 서로 뒤바뀐 가운데, 개로 변한 현지는 혼자서 1등을 할 것이 아니라 다 같이 1등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또한 사람으로 변한 밀키를 통해 한 끼의 식사,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 친구와의 우정 등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것이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 태도임을 깨닫게 한다. ‘반려 동물’천만 시대라고 한다. 현대인들이 느끼는 정서적 외로움의 무게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통계이기도 하다. 그만큼 정서적으로 의지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개를 부러워하는 우리 아이들을 보고 그냥 철이 없다고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남을 이겨야 한다는 경쟁의 논리를 넘어 협력하고 배려하는 삶의 소중함을 배우게 해야 한다.
추천자 : 김영찬(서울 광성중학교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