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국 근현대사 작은도서관

2018.09.17

송파중 사거리의 '비밀의 서재'
한국 근현대사 작은도서관



송파중 사거리에 위치한 작은 상가 건물 지하. 눈에 띄는 사인물이 없어 동네 사람들도 그 존재를 잘 모르는 이곳에 놀랍게도 <승정원일기>를 소장한 '한국 근현대사 작은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책 향기가 코 끝을 간지럽힌다.

서울교대 이연복 명예교수가 평생을 모은 역사 책들이 뿜어내는 세월의 향기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귀한 책들이 빼곡히 들어선 모양이 마치 동화 속 비밀의 서재 같은 이곳, 아무리 봐도 도서관이 있을만한 자리는 아닌 곳에 어떻게 도서관이 만들어지게 됐을까?



도서관이 개관한 것은 지난 2015년 10월 무렵. 미술교육자인 이 명예교수의 장남 이주원 부관장이 아버지의 장서를 직접 자가용으로 실어 날라 만든 공간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 미술을 유한한 이 부관장은 유학 시절 프랑스 사람들의 자국 역사에 대한 강한 긍지와 이들의 일상에 녹아든 도서관 문화를 목격하곤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한국인들 역시 프랑스인들처럼 스스로의 역사에 긍지를 가질 자격이 충분함에도, 상당수 한국인들이 한국사를 그저 '수능필수과목' 정도로만 취급하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점수화되지 않는 것, 재화가 되지 않는 것은 잘 가르치지 않고 배우려 하지도 않는 문화가 한국 교육에는 아직도 남아 있어요. 자연스레 정신적인 가치나 성숙한 시민의식 같은 것들을 충분히 느끼고 배울 기회가 부족해지죠. 역사를 다룸에 있어서도 그래요. 프랑스에 가면 무명용사들을 추모할 수 있는 장소가 시민들이 오가는 길목에 마련돼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여러모로 대조적이죠. 학생들이 입시 외의 배움과 다양한 경험을 누릴 기회가 많지 않은 우리의 현실과 프랑스인들의 가치관을 비교해보니, 자존심마저 상하더군요."



이 점이 늘 아쉬웠던 그는 도서관 건립을 본격 추진하게 된다.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월세 부담은 크지 않은 지금의 자리를 찾게 되었다. 허름한 동네 상가에 조선왕조실록을 보유한 도서관이 들어서게 된 배경이다.

누구나 와서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지만 장서들의 역사적 가치나 보존 상태는 박물관 못잖다.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은 소장자인 이연복 교수가 손주에게 물려주라고 신신당부한 보물이다. 우리의 역사를 지워버리려던 일제에 맞서 민족이 '혼'을 지켜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책으로, 이제는 책의 제작과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됐다.



40년도 더 된 <마르크스 평전>은 비록 낡았으나 여전히 그 행간에서 저자의 젊은 열정과 총기가 뿜어져 나온다. 1976년도에 출판된 <새마을운동>은 새마을운동의 현장을 당시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서가 한 켠에 대한 졸업앨범들이 꽂혀 있기에 그 사연을 알아보니, 4.19 혁명에 참여한 학생들의 모습을 간직하여 역사 자료로 쓰기 위함이란다. 피가 뜨거웠던 시절, 혁명에 몸소 뛰어들었던 이연복 교수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자 교과서에서 볼 수 없는 살아있는 현장의 자료다.

이처럼 소장 도서들의 가치가 크고, 다루는 주제가 가진 무게감 역시 상당하지만 공간의 분위기는 의외로 가볍고 산뜻하다. 권위적인 느낌을 예상과는 다르게 자원봉사자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함께 간식을 나눠 먹으며 숙제를 하는 어린이 이용자의 모습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과 역사를 시민의 일상으로 끌어오려는 설립 취지를 실천에 옮기면서 나타나는 파격적인 광경이다.



주민의 일상 속에 찾아가는 도서관이 되고자,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특히 매주 화, 목요일 진행되는 아동 대상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은 도서관의 자랑으로 정년퇴직하신 선생님들이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보듬어가며 성심껏 책을 읽어 준다.

한문이 가득 적힌 근현대사 도서관 서가의 책을 바로 읽기엔 무리가 있어 동화책을 주로 읽어주고 있긴 하지만, 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책을 읽는 경험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자산이다.

개인이 도서관을 운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루는 책이 무거운 주제이다 보니 입장료 수익 등의 현실적인 수입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 안에서 책 소독기는 전기 요금을 속절없이 잡아먹는다.

무언가 큰 프로젝트를 실행하려면 작은도서관끼리의 협업이 필요한데 그 또한 말처럼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 정보를 알고 배우기 위한 장소로 도서관보다는 대형 서점을 선호하는 요즘 독자들이 지식 소비 형태 역시 동네 도서관으로의 발걸음을 설득하기 어렵게 한다.



하지만 이 부관장은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한 분야에 평생을 몸담다 은퇴한 시민들의 전문성을 도서관이 활용하는 방안부터, 지역 정치인들이 지역 주민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이들과의 유대를 쌓아가는 공간으로 도서관을 이용하는 방법 등 다양한 청사진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하다.

이 청사진은 이 부관장 혼자만의 것이 아닌, 한국사를 사랑하는 이들과 지역 시민들 모두의 것이다. 뜻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주저 없이 한국 근현대사 작은 도서관의 문을 두드려보길 바란다. 차 한 잔 마시고 자리를 떠도 좋다.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발길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일이니 말이다.


■ 한국 근현대사 작은도서관
운영 평일(월~금) 10:00~18:00
주소 서울시 송파구 중대로20길 51, 지하 1층
문의 070-8154-2000
http://cafe.naver.com/koreasotry
https://band.us/band/60708702


/ 출처 : 송파동네골목매거진 '페이퍼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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