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운영사례
[충북] 배바우 작은도서관
게임하고 삼겹살 굽고, 아이들 사로잡은 도서관의 비결
배바우 작은도서관
충북 옥천군 안남면 청정리 안남배바우작은도서관(이하 배바우도서관)은 일요일·공휴일을 제외하곤 어김없이 문을 연다. 논 바로 앞 도서관이라니.
2월 14일 오전 10시에 찾은 배바우도서관은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왁자지껄 웃음소리로 방문객을 먼저 반겼다. '청소년 쉼터'에 모여 보드게임에 한창인 청소년들이다. 강라온(12), 장한나(12), 신소율(14), 박소영(14)씨가 머리를 맞대고 카드놀이에 빠졌다. 오늘 아침 마을 순환버스를 함께 타고 왔다고. 덕실마을, 서당골, 학교앞 마을 등 각자 다른 정류장에서 같은 버스에 올라탔다.
"쉼터에 새 책도 들어오고 칠판도 생겼어요. 보드게임도요." (신소율씨)
이전엔 책장으로 가득했던 청소년 쉼터. 지난해 12월 배바우도서관 청소년운영위원회 회의 끝에 푹신한 의자를 들이고 책장에 가려진 칠판을 살려냈다. 그림도 그리고 회의 할 때도 여러모로 유용한 칠판이다. '신간 도서' 자리엔 운영위가 직접 선정한 새 책이 가득했다. 각종 보드게임도 함께 논의해 고른 것들. 오늘의 게임은 청성면 아자학교에서 만든 '아자카드'다.
"보드게임 중에서 아자카드가 제일 재밌어요." (장한나씨)
2층으로 가는 계단 밑에도 한 무리의 청소년이 모여 수다 삼매경이다. 안락한 쿠션 위에 누워 쉴 수 있도록 조성된 그야말로 '아지트' 같은 곳.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놀았다는 김가은(18), 노승희(16), 신승호(17), 민나현(17)씨는 이제 모두 중학생·고등학생이 됐다. 마을 친구들과 만나는 곳은 항상 이곳 배바우도서관이다.
"다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녀서 잘 아는 사이죠. 초등학생 때부터 와서 지금 고등학생이니까, 도서관에 온 지... 10년 정도 됐네요." (김가은씨)
함께 햇수를 세어보던 친구들이 '벌써 그렇게 됐어' 너도나도 놀란다. 10년. 그 오랜 시간 도서관은 한결같이 그들을 반겼다. 그사이 쌓은 추억의 무게는 깊을 수밖에 없다.
"코로나 전엔 '하룻밤 잠자기'라고 도서관에서 같이 자기도 했어요. 그날 여러 활동도 하고 음식도 만들어 먹고, 다 같이 이불 펴고 잠도 잤죠. 그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노승희씨)
'하룻밤 잠자기'는 도서관 개관 때부터 이어져 온 행사. 마을 청소년부터 안남어머니학교 학생들, 도서관 봉사를 온 대학생들까지. 함께 어우러져 밥 먹고, 이야기하고, 밤에는 천체 망원경으로 별도 보며 서로의 하루를 나눈다. 코로나19로 멈춰버린 지금, 언제 또 도서관에서 이불을 펴고 함께 놀 수 있을지 아쉬울 따름이다.
도서관 뒤편의 논에서는 해마다 얼굴을 맞대고 벼를 심어 왔다.
"다 같이 모내기도 하고, 벼 베기 행사도 해요. 그걸로 가래떡도 만들어서 나눠 먹죠." (노승희씨)
논바닥에 발을 담그고 땀 흘리다 보면 어느새 모두 하나가 된다. 이외에 각종 공예 체험, 농촌 인문학 강연, 도서관 옆 정자 지붕 이엉 얹기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 이곳에선 '남'이 없다. 모두 우리 마을 '식구'다.
"이름도 나이도 서로 다 알죠. 항상 만나니까요. 예전엔 같이 술래잡기하면서 뛰어놀기도 하고 그랬어요." (박영호씨)
이번에 안남초를 졸업한 박영호씨는 안남에 살기 시작한 4살 때부터 배바우도서관에 왔다. 중학교 가면 공부하느라 도서관 올 틈이 없을 거라며 무뚝뚝하게 말하는데, 그래서인지 중간중간 내쉬는 한숨이 짙다. '영호 형' 곁에서 즐겁게 놀던 김성경씨는 올해 6학년이다. 1학년 때부터 도서관에 종종 놀러 왔다고. 그런데 이날 도서관에 온 이유는 좀 특별했다.
"삼겹살 먹으러 왔어요!"
낮 12시 땡, 점심시간이 되자 도서관 곳곳에 흩어졌던 청소년들이 하나, 둘 부엌 뒤편 야외 식탁으로 모여든다. 너나 할 것 없이 수저와 컵을 나르며 식사 준비에 동참했다. 소소하면서도 특별한 점심. 온종일 함께 놀고, 밥도 같이 먹으니 정말 '식구'가 맞다.
"집에서 먹으면 얘기할 사람이 없는데 여기서 먹으면 친구들이랑 수다도 떨 수 있으니까 밥 먹는 시간이 재밌어요." (강라온씨)
주민들이 일궈낸 농촌 지역 문화·돌봄터
"배배우도서관은 다같이 모여서 놀 수 있는 곳이에요. 겨울엔 따듯해서 좋고, 더운 여름엔 시원해서 좋아요. 여기가 제2의 집이 아닐까 생각해요." (김정은씨, 17세)
청소년 놀이터로, 주민 사랑방으로 자리잡은 배바우도서관. 그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2002년에 안남면 주민자치센터가 만들어지고, 2003년 어르신 한글 교실 '안남어머니학교'가 만들어지면서 지역 교육·문화와 관련된 자치활동이 시작됐어요. 놀토가 있던 시절엔 놀토 프로그램도 운영했죠. 도서관 만들어지기 전부터 그런 흐름이 있어 온 거예요." (주교종 전 관장)
개관 후 11년 동안 관장을 맡은 주교종씨는 안남 자치의 오랜 흐름이 배바우도서관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말한다. 도서관 설립 이야기가 시작된 건 2006년. 당시 청산초 도서관이 한겨레신문과 책읽는사회문화재단 '희망의 도서관 만들기' 사업에 선정돼 공간 정비비를 지원받았다.
이 과정에서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이 국립중앙도서관과 '작은도서관 만들기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음을 알게 된 옥천신문 황민호 대표는 이를 안남에 소개하며 도서관 건립의 불씨를 피웠다. 농촌 지역 작은도서관 사업이 막 부흥하던 시기였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부담스러워 했어요. 돈도 들고, 전문인력도 갖춰야 하는데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었죠. 그러다 의견이 둘로 나뉘었어요."
한편에선 "보조사업이라고 덜컥했다가 건물만 덜렁 남게 되면 낭패"라는 의견이, 한편에선 "안남이 작은 지역인 데다 학생 수도 점점 적어지는데, 도서관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었다.
"다 농사짓는 사람들이지만 논두렁, 밭두렁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죠. 그런 문화를 함께 만들어보자고요."
마땅한 문화시설도, 청소년 공간도 없는 마을에 도서관은 새로운 활기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주민들이 모여 안남도서관설립추진위원회가 꾸려졌고, 수차례의 회의와 전국 선진 도서관 견학 등 준비를 이어간 끝에 2007년 공모 사업지로 선정되면서 건축비 2억 원을 지원받는다.
이후 영구 무상임대를 약속한 당시 안남농협(현 대청농협 안남지점) 소유지에 도서관을 짓기 시작했다. 함께 어울려 식사할 부엌, 청소년이 뛰어놀 다락방 등 세심하게 설계된 건물이었다. 그렇게 배바우도서관은 2007년 7월 20일, 주민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활짝 문을 연다.
"학교 끝나면 어디 갈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도서관이 생기면서 청소년 공간이 만들어졌죠. 또 2009년엔 마을 순환버스가 생기면서 아이들 귀가도 걱정 없게 됐어요."
마을 순환버스는 도서관에 이어 일궈낸 또 다른 경사였다. 읍으로 집중된 대중교통 체계는 면 지역 내 곳곳에 떨어진 마을들을 잇지 못한다. 안남어머니학교로 등교하는 학생들도, 도서관을 찾는 청소년도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각 마을을 순환하는 버스가 필요했다.
의지를 모은 주민들은 수계기금 대단위 주민지원사업비를 마을 순환버스 마련에 활용했다. 운행 14년 차에 접어든 올해, 순환버스는 여전히 주민들의 '발'이 돼주고 있다. 순환버스 운전대를 줄곧 잡아 온 주재결씨는 마을 청소년들이 "애기 때부터 봤으니께 뭐, 다 손녀 손자 같"다.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9번 운행해요. 어머니학교 열리는 화, 금에는 10번 하고요. 어르신하고 애들이 고맙다고 인사할 때마다 좋지요." (주재결씨)
앞으로 배바우도서관이 그려갈 하루
"청소년위원 여러분, 청소년 쉼터로 모여주세요."
시곗바늘이 오후 3시를 가리키자 곳곳에 흩어진 청소년이 한곳에 모였다. 오늘은 청소년운영위 회의가 열리는 날. 이번 안건은 '문화가 있는 날'에 진행할 활동 논의였다. 공예부터 목공, 전통놀이, 연극, 타로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다.
"성과가 있는 활동을 하는 건 어떨까요? 직접 만든 결과물을 보면 뿌듯하니까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게 성과보다는 재밌는 활동을 하면 좋겠습니다."
최종 결론을 향해 위원들은 모두 적극적이고 진지하게 논의를 이어갔다. 지난해 9월 시작된 청소년운영위는 새 책 구입, 공간 조성 등 도서관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결정한다. 청소년위원 노승희씨는 도서관 부관장을 맡고도 있다. 청소년은 이제 돌봄 대상일 뿐만 아니라 도서관 운영 주체가 됐다. 그렇게 배바우도서관은 또 한발 나아가는 중이다.
"어른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본인들이 정말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할 수 있도록 곁에서 지원하는 방향이에요. '청소년이 교육의 주인공'이라는 말을 실현해가는 거죠." (홍용훈 관장)
올해 시작된 순회사서제 또한 새로운 변화 중 하나다. 지난 2월부터 매주 수요일 순회사서 한은미 씨가 도서관을 찾아 사서 업무를 지원하고 있다. 김선주 사무국장은 책 읽기 더 좋은 환경이 마련될 것 같다는 기대를 품는다.
"지금까진 전문 사서 인력이 지원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도서 분류를 제대로 하기 어려웠는데, 이번 기회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 잘 갖춰놓으면 앞으로 더 수월하게 책을 관리할 수 있을 거예요. 주민들이 읽고 싶은 책도 바로 찾아드릴 수 있고요." (김선주씨)
오후 5시 반, 이제 슬슬 집에 갈 시간이다. 순환버스 시동이 켜진다. 우다다 신발을 꺼내 신은 청소년들이 버스 위로 올라탔다. 손 흔드는 어깨너머, 버스가 마을을 향해 달린다. 내일도 또 도서관에서 만날 테니 크게 아쉽지는 않다.
"처음 도서관이 개관할 땐 다들 우려했어요. 3년 이내 문을 닫을 거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잘 이어져 왔네요." (주교종씨)
그 비결은 무엇일까. 공동체를 가꾸기 위해 마을이 직접 주체가 됐기 때문 아닐까.
"지역 주민이 스스로 운영했기에 활성화될 수 있었어요. 모든 문제를 주민들이 직접 해결하죠. 만들어진 틀이 없어요. 마을 구성원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결정하는 거죠. 아무리 좋은 시설과 인력을 갖춘다고 해도 정해진 시스템에만 맞춘다면 활성화될 수 없지 않을까요?
외지에 나갔던 자식들에게 '지역을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물으면 다들 '도서관에 후원해야지' 말해요. 그런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거죠. 마을에 있는 작은도서관은 지역과 함께 호흡하고, 지역에 스며드는 곳이어야 해요."
마을은 도서관을, 도서관은 마을을 돌본다. 그렇게 안남과 배바우도서관은 함께 숨 쉬고 자라나고 있다.
■ 배바우 작은도서관
유형 사립 작은도서관
운영 월~금 09:00~18:00, 토 10:00~17:00, 일 휴관
주소 충북 옥천군 안남면 안남로 456
/출처 : 오마이뉴스, 글·사진 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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