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악양 작은도서관 책보따리

2020.07.30

통학버스도 선다, 전교생이 학교 끝나고 찾는 이곳

악양 작은도서관 책보따리


장맛비 대신 가늘고 성근 물방울들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6월 말의 어느 아침.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 자리한 작은 도서관 책보따리 1층 공간은 여남은 명의 여자 어르신들로 빼곡하다. 앞에 놓인 화이트보드며 책상 위에 펼쳐진 공책, 저마다 펜을 쥔 채 뭔가를 읽고 쓰는 모습 등이 여느 학교의 흔한 풍경과 다르지 않다 싶다. 아니나 다를까 도서관 관장 조성희(49)씨가 말하길, 그분들 모두는 문해교실 2학년 '학생'이란다.


"어머님들은 여기를 학교라고 불러요. 주로 한글을 배우지만 미술수업도 받으시죠. '내는 몬한다'고 하시면서도 막상 크레파스를 잡으면 얼마나 근사한 작품들을 쏟아내는지 몰라요. 작년에는 다 같이 소풍도 다녀왔어요. 구례에서 피자 만들기 체험하고 남원 광한루에서 그네도 탔는데, 글쎄 어떤 분은 난생처음 소풍이란 걸 와봤다면서 우시더라고요."


오전엔 학교, 오후엔 놀이터


평일 오전에 열리는 문해교실이 끝나면, 그제야 도서관은 고요해진다.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면과 2층 서가를 가득 채운 책들이 비로소 깨어나는 시간인 것. 이 무렵에 책보따리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주제별로 꽂힌 책등을 눈으로 훑다가 마음에 드는 몇 권을 빼 들고 앉아 찬찬히 책장을 넘겨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느긋한 독서삼매가 그리 오래 허용되지는 않는다. 오후 두세 시부터 이곳은 악양면 초등학생들의 차지가 되어 곧 와글와글한 놀이터로 변하기 때문이다.



"자기들끼리 이것저것 하면서 놀기도 하고 강사분들이 하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해요. 어린아이들에게는 동화를 읽어주고, 초등생들과는 연필소묘와 요가, 자수, 심리여행 같은 것들을 진행하고 있어요. 자원봉사 엄마들이 준비해 먹이는 간식은 늘 인기가 많죠. 고학년들은 학원이나 피씨방 갔다가도 간식 먹으러 올 정도예요."


도시도 마찬가지겠지만 시골 부모들은 먹고사는 일에 종일 매여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학교는 어정쩡한 시간에 끝나버리니 그 후 갈 데 없는 아이들이 문제다. 책보따리 도서관이 주로 초등생 저학년들의 방과후교실이자 돌봄 공간으로 쓰이게 된 데는 이런 환경 탓이 크다. 부모가 집에 데리고 갈 때까지 아이들이 안전하게 머물며 놀 곳이 절실히 필요했다고 할까.


"하루에 적어도 한 번은 도서관이 장날 시장통처럼 바글거리는 순간이 와요. 악양면 초등학생 수가 84명인데 대부분이 도서관엘 오거든요. 그러다 보니 엄마들은 어떻게든 도우려고 하죠. 액수는 많지 않지만 후원금도 꾸준히 들어오고요. 또 외국에서 온 이주민인 엄마들이 전에는 휴대폰으로 아이만 살짝 불러냈는데, 요즘은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를 하세요. 그렇게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는 게 저는 참 기쁘더라고요."


씨앗 하나에서 시작된 '작지 않은' 변화

작은 도서관 책보따리가 처음 문을 연 것이 2010년 9월이니 올해 가을이면 꽉 찬 열 살이 된다. 돌아보면 그 시작점엔 역시 학부모들이 있었다. 그 당시 "제도권 교육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없는 것을 우리가 직접 하자"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이들은 모두 14명. 그중 한 사람이자 지금도 도서관의 든든한 지원자인 김난영(57)씨에게, 십 년 전 그때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그 열네 명은 귀농한 일곱 쌍의 부부였어요. 공부와 성적을 떠나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행복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뭉쳤던 거죠. 그래서 다짜고짜 시작한 게 '동네한바퀴'라고, 트럭에 아이들을 싣고 평사리공원이며 회남재숲길 같은 데 가서 도시락 까먹고 실컷 놀다 오는 거였어요. 그런 경험이 너무 좋아서 허름한 가건물을 빌려 도서관 문패도 달았고요. 비만 오면 천장이 새서 지붕에 올라가 콜타르 바르고 벽에 핀 곰팡이를 닦아내곤 했었는데, 그런 걸 전부 아이들과 놀이하듯 하니까 힘들기보다는 재밌고 뿌듯했지요."


어른과 아이가 함께 모여 꿈틀대며 일을 벌이는 게 신기했던지 지자체가 나서서 문화체육관광부의 작은 도서관 조성 지원사업에 참여해 보자고 책보따리에 제안했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억 원의 사업비를 지원받아 당시 농협 창고로 쓰던 자리에 현재의 도서관 건물이 들어서게 됐다. 이게 2013년 7월의 일이다.


"워낙 큰 사업이다 보니 일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갈등이 쌓이고 상처도 남더라고요. 선주민과 귀농인의 관계를 풀어내는 것도, 동네한바퀴를 같이 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조율하는 것도 쉽진 않았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어른에게도 그런 공간 하나는 꼭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에요."


악양의 아름다운 자연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 속에서 마음껏 뛰노는 기쁨을 선물하고 싶어 시작했던 동네한바퀴. 그 소박한 씨앗 하나를 심은 자리에 이제는 번듯한 건물이 서 있고, 일주일 내내 학부모 자원봉사로 굴러가던 체제도 하동군에서 사서를 고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의미 있는 변화는 '도서관이 대체 왜 필요하냐'며 고개를 젓던 지역 인사들의 태도가 조금씩, 서서히, 그래도 어쨌든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2년째 관장 일을 하며 이를 가장 섬세하게 느끼고 있을 조성희씨가 말한다.


"원래는 학교 스쿨버스가 도서관 앞에 서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대다수 아이들이 학교 끝나면 바로 여기로 오니까 지침을 바꾸더라고요. 또 작년에는 악양초 교장 선생님이 적극 추천해주신 덕분에 책보따리가 '마을학교' 주체로 선정돼 지원을 받았어요. 이런 게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지역 여론이나 인식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들이죠."


최근 하동군의 리모델링 사업으로 도서관이 채택되면서 내년쯤 새로운 부지에 건물을 짓게 된 것도,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해진 사례 중 하나다. 그렇다고 도서관 환경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지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번엔 도서관 운영진이 내부 설계에 관여해 "초등학생과 청소년, 그리고 성인에게 필요한 세 개의 분리된 공간을 확보"할 계획이다. 그것만으로도 설렐 이유는 충분하다고.


도서관과 함께 자라는 사람들


7년 전 여름, 비 새는 가건물을 벗어나 도서관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심은 나무가 어느덧 2층 높이만큼 자라 있다. 그 사이 '세대교체'가 일어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과거에 책보따리에서 살다시피 하던 아이들은 대부분 대학생이나 사회인이 되어 외지로 나갔고, 그때 엄마 등에 업혀 있던 갓난쟁이들이 자라나 윗세대가 빠져나간 공간을 휘젓고 다닌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도서관 일에 나서는 엄마들도 바뀌어요. 열심히 했던 분이 한발 물러서거나 아예 이 지역을 떠나기도 하고, 잘 안 오던 분이 자원봉사를 시작하기도 하죠. 또 새로 귀농한 분이 들어오기도 하고요. 저희는 관장도 엄마들이 2년마다 돌아가며 맡아요. 그렇게 사람이 교체되면서 도서관은 계속 굴러가는 거예요."


조성희 관장의 말에 김난영씨가 덧붙인다. 그게 가능한 것은 "책보따리가 이 지역에 계속 남아 있기를 바라는 모두의 마음" 덕분이라고.


일상의 의무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할머니가 됐을 때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싶다고 입을 모으는 두 사람을 보니, 이제 좀 알 것도 같다. 시골의 작은 도서관이 왜 이토록 크고 깊게 느껴지는지. 그리고 문득 궁금해진다. 십 년 후 창밖의 저 나무가 더 높이 자라 무성한 그늘을 드리울 때쯤, 책보따리와 그 안을 채운 사람들은 또 어떤 향기와 색깔로 악양을 물들이고 있을지가.


■ 악양 작은도서관 책보따리

유형 사립 작은도서관
운영 평일 12:00~18:00 , 토요일 12:00~18:00, 일요일 11:00~17:00
주소 경남 하동군 악양면 악양서로 384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hackbo



글/ 자야, 사진/임현택, 기획진행/누리

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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