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운영사례
[전북] 책마을해리
바다를 닮은 푸른푸른 이름 사이를 거닐어요, 책과 책 사이에 머물러요
책마을해리
읽기 너머 쓰고 펴내기, 해리포터를 닮았다는 사람들과
가을이 찬찬히 익어가는 들녘 한 켠, 늦드록 불빛이 환해요. 가을걷이 분주한 농부들이 잠에 들어도, 초롱초롱 눈빛 맑기만 한 곳이에요. 책방해리예요. 출판 기획자며 편집자, 디자이너들이 어울려 사는 이 곳은 '해리'를 돌림자로 써요. 그 맨 앞이 책마을해리예요. 원조 유럽 책마을을 닮아 17만 권 장서를 마련해 읽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나 쓰고 펴내는 공간, 독자에서 저자로 관계가 뒤바뀌는 마법이 일어나는 공간이기도 해요. 해리포터를 닮은 사람들이 이룩한 작은 세계예요.
▲누구나책 출판결과물
책마을 해리 간판을 내건 2012년부터 지금까지 어린이 청소년부터 마을 어르신까지 2,000여 명 남짓이 출판프로젝트에 참여해 200여 종 책을 펴냈으니까요. 완전 허튼 이야기는 아니에요. 책방해리는 그 가운데 정식 출판한 100여 종 책을 모아 내어놓고 있어요. 몇몇 친구출판사 책을 빼면 책방해리에서 만나는 책은 모두 책마을해리를 통해 기획하고 출판하는 책들이에요. 로컬콘텐츠 출판공간 책마을해리에게는 2,000명 저자를 독자와 만나게 하는 쇼룸이에요. 물론 정식 출판한 책마을해리 책들은 도서출판기역(인문교양 부문)으로, 나무늘보(어린이청소년 부문)로, 책마을해리(그림책 부문)로 유통 경로를 따라 우리나라 곳곳에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답니다.
책의 바탕 종이 활자로부터 온갖 책의 이야기가 넘실대는 책마을 해리
책방해리가 놓인 책마을 해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과 이름이 닮은 바닷가 폐교에 자리 잡고 있어요. 해리포터를 닮았다 어쩌고 했는데, 그보다는 이곳 해리면에서 따론 해리(海里)라는 이름이에요. 책마을 해리는 '누구나 책 누구나 도서관'을 표방하고 시작한 '출판테마공간'이에요.
▲버들눈도서관 그림책작가와의 만남
누구나 간직한 이야기 씨앗을 잘 살펴 책을 피어 올리게 도와주는 곳이에요. 그러느라 읽고 뭔가 하고 쓰는 공간, 펴내기와 닿은 공간이 빼곡해요. 책 만들기를 중심에 두고 살았던 사람들이 모여 그 이야기 만드는 법을 지역 미래세대에게 전하는 공간인 누리책공방부터, 읽기 공간 버들눈작은도서관, 나무 위 집 동학평화도서관 등이 있어요. 또 한 권 책을 들고 들어가 다 읽기 전까지 나올 수 없는 책감옥이나 책숲시간의 숲, 나무공방과 철공방, 책마을갤러리, 책의 바탕 이야기를 전하는 한지 활자공방, 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닥나무며 닥솥, 닥돌 등 옛 도구를 통해 보여주는 정원 종이숲, 바람 언덕 같은 책을 닮은 공간으로 모두와 만나고 있어요.
▲대나무하우스 여름책학교 물총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로컬 콘텐츠를 지역 사람들과 함께 길어올리는 책학교해리
1980년대 한때는 800명이 넘게 이 공간에서 뛰놀았다고해요. 그 많던 아이들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 도시로, 도시로 떠나고 폐교로 텅 빈 이곳에 이제 조금씩 아이들의 아이들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어요. 책학교해리라는 책과 노는 학교를 통해서예요. 책학교해리는 책을 만드는 과정을 안내하는 출판캠프로 시작해요. 스무 명이든 서른 명이든 청소년 친구들이 책마을해리 출판사와 '출판권설정계약'을 맺고 약속대로 한 편, 재미 한 편, 골머리 앓는 '쓰기'과정을 시작하는 것이에요. 책학교는 시인학교, 만화학교, 생태캠프, 서평학교, 그림책학교, 동학역사캠프, 삶글학교 같은 다양한 빛깔로 피어나요. 이제 아시겠죠? 모든 학교과정의 마무리는 시집으로, 만화책으로, 생태도감으로, 그림책으로, 동학신문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을요.
▲할매작가들과의 만남
마을 할머니들의 마을학교 "밭매다딴짓거리"도 이름값을 해요. 평생 밭이랑에 앉아 일로 살아온 할매들이 일주일 하루 두 시간 그림 그리고 글짓고 책 읽고 노는 딴짓을 벌이는 학교에요. 매년 단행본으로 그림책으로 그 과정을 기록해 출판해오고 있어요.
지역 학교 친구들과 '공모(共謨)'해버리면 사람들의 이갸기를 신문으로 엮어내기도 해요. 방과후마을학교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는 마을신문 기자단, 마을교과서 만들기예요. 『마을신문해리』는 한 번에 타블로이드 8면, 4,000부를 찍는 해리면 소식지예요. 그 가운데 2,000부는 해리면 사무소와 전국 출향인들에게 보내고 있어요. '해리'돌림자에는 '책영화제해리'도 있어요. 책을 원전으로 하는 영화만 찾아 밤낮가리지 않고 며칠 책과 영화 속에 빠져보자는 작은 축제예요. 지난 9월 말 세 번째 책 영화제를 치렀어요.
책감옥에서 대하소설 첫 권 떼기, 읽기 대장정에 도전해보세요
책마을해리 책감옥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요. 이 이야기를 좀 자세히 해볼게요. 2001년 폐교된 책마을해리에는 교실에서 교실로 길게 이어지다가 지금은 철공방으로 쓰는 식당조리실에 닿고, 그 너머 작은 창고 건물이 별채처럼 외롭게 있었어요. 처음 열어보았을 때 켜켜이 먼지를 두집어쓰고 팔뚝만한 윷놀이 윷이며 운동회에 쓰던 깃발과 깃발꽂이, 삭아서 부스러지던 훌라후프, 계주용 바통이 제 본래 빛을 잃고 뒹굴고 있어요. 예닐곱 어른이 앉으면 꽉 들어차는 작은 공간에 우리는 '책감옥'이라고 이름을 지어 붙였어요. 한번 들어가면 책 한 권 다 읽어야 나올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조건을 달아서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어요. 때때로 열리는 출판캠프에 찾아든 어린 친구들에게 그 '엄격한' 통제 공간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어요. "감옥이라는데, 책을 읽을 수 있대." 그렇게 책감옥 이름을 붙이고 얼마지 않아서예요. 책마을해리와 인연 있던 박정섭 그림책 작가가 장마를 무릅쓰고 책마을을 찾았어요. 그도 책감옥에 갇혀 이틀에 걸쳐 그의 그림책 『도둑을 잡아라』의 도둑 캐릭터로 감옥 안을 산뜻하게 꾸며주었어요.
▲책감옥 : 한 번 들어가면 한 권 책을 다 읽기 전까지 나올 수 없다
지금 책감옥은 새 나무로 바닥을 짜올려 습한 기운을 잡았어요. 감옥 문도 나무로 새로 짜서 사식을 넣는 식구통을 달아 한결 감옥 같은 느낌을 주었어요. 몇 해 전부터는 '대하소설 천 권 떼기'라 이름 붙여 책감옥 안 한 쪽에 대하소설을 나무서가에 차곡차곡 챙겨두었어요. 긴 호흡 이야기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장편 대하소설 맛을 좀 보게 하고 싶었거든요. 책마을해리 어디에선가 대하소설 첫 권을 읽고 생활로 돌아가서 언제든 그 대하소설을 다 읽으면 책마을에서 준비한 각종 선물(책마을해리 굿즈)을 드리겠노라는 행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에요.
온전히 책과 만나는 시간과 공간, 누구나 마음 속 책마을해리
요즘은 함께 읽기를 통해 다시 소리로 책을 소비하는 흐름이 생겼지만, 오랫동안 우리는 내면의 소리로 책을 읽어왔어요. 책과 우리 사이 거리가 다른 어떤 매체보다 가까웠죠. 활자가 걸어가는 속도에 눈동자를 맞추고, 손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며 우리 온 감각으로 책과 만나지 않으면, 책은 우리에게 단 한 줄도 뜻을 내어주지 않기 때문이에요.
책감옥 이야기를 굳이 꺼내든 것은, 우리도 다시 그렇게 온전히 책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뜻에서예요. 휴대전화에서 '카톡카톡' 울리는 전자음에서 벗어나 오로지 책과 만나는 장소와 시간. 그곳이 어디든, 저마다 자기 내면과 만나는 황홀한 책감옥이겠지요. 그래도 책마을해리에 오시거든, 내 삶에서 꼭 읽겠다는 책 한 권 챙겨서 책감옥세 스스로 갇혀보세요. 읽기 진도가 잘 나가신다면, 혹은 한 줄 너머 두 줄, 책 이갸기며 살아낸 이야기를 옮겨주신다면, 밥은 물론. 맥주도 한 캔 챙겨 드릴게요.
▲나무 위 동학평화도서관
언젠가 한 권 멋들어진 이야기로 피어낼 그 책으로요
책 속 글과 글 사이에 파묻히거나 한 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림을 그리는 사이, 바다로부터 상근 기척이 전해져요. 책방해리에서 시작한 '해리' 돌림이름은 책마을해리로, 책학교해리로 마을신문해리에서 다시 책영화제해리로 이어졌어요. 이곳에 책의 공간을 연 지 이제 8년째, 이야기는 로컬콘텐츠로 펴낸 책들의 키만큼이나 커졌어요. 이 가을이 더 깊어 경계를 잃기 전에 책마을해리, 책방해리로 오세요. 책의 숲에서 내 안에 은근히 도사리는 이야기의 씨앗을 찾고 싹을 틔어가세요. 언젠가 한 권 멋들어지게 피워낼, 그 책이 되도록요.
/이대건 책마을해리 촌장
월간 국회도서관 2019.11(Vol.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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