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글 쓰고, 놀고, 밥 먹고…동네 도서관으로 출근합니다

매체명 : 중앙일보 보도일 : 2018.11.26
링크주소
https://news.joins.com/article/23155393
글 쓰고, 놀고, 밥 먹고…동네 도서관으로 출근합니다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5)

내가 낮에 주로 머무는 곳은 동네 도서관이다. 자전거로 5분 거리인 동대문도서관으로 출근해서 책 보고 글 쓰고 스마트폰 채팅하고 꾸벅꾸벅 졸다 시간 되면 근처에서 밥을 사 먹거나 친구를 만나러 시내에 나간다. 그 도서관은 외곽과 도심의 중간인 신설동에 있어 활동하기 편하다. 포스트모던을 의도한 것 같지는 않은데 옛 건물치고는 특이하게도 삼각형이다. 바로 옆이 서울풍물시장이라 주말이면 중년의 인파로 북적거린다.

집에는 내 공간이 없다. 33평 아파트라면 중산층 4인 가정에는 대체로 무난한 주거환경이지만, 남편은 직장에서 아이들은 학교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던 시기가 지나고 나니 어른 넷이 종일 붙어있기에 비좁은 감이 있다. 특히 내가 오롯이 사용할 공간이 없다.

안방은 부부의 침실이고 아이들에게 방 하나씩 내주고 나면 남는 공간은 거실뿐인데 작년까지 없던 대형 TV가 둘째의 대학 입학과 함께 집에 들어왔고, 소파 두 개, 강아지의 주거공간, 게다가 우리 부부의 책상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다. 좁아진 것도 문제이지만 과연 TV와 독서가 공존할 수 있는 성질인가.

그래서 바깥으로 나가기로 했다. 뒷골목의 허름한 건물 맨 꼭대기 사무실이라도 싼값에 빌려 나름대로 뭔가 도모해보겠다던 계획은 벌이가 있던 시절에 막연히 갖던 생각이었다. 막상 필요하니 그런 사무실이 눈에 띄지도 않았고, 수입이 적으니 많든 적든 임대료 지출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아, 이럴 때마다 담양에서 본 면앙정, 독수정, 서하당 같은 정자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러면서 한두 번씩 찾아가던 도서관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나의 근거지가 되었다. 컴퓨터, 프린터, 복사기, 정수기가 갖춰져 있고 완벽한 냉난방에 신간도 부지런히 채워 넣으니, 약간의 적응 기간이 지난 다음부터는 연구실로 최적이었다.

옛날에는 시험 기간에 공공도서관에서 공부 한번 하려면 자리 날 때까지 바깥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곳곳에 도서관이 많아져 항상 자리가 넉넉하다. 사서도 많고, 인문교양강좌도 정기적으로 열린다. 바깥보다 적당히 저렴한 카페와 식당도 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종합문화공간이다. 그러고 보니 대학 시절에도 학교 도서관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요즘의 동네 도서관이 그때의 대학도서관보다 훨씬 훌륭하다. 당시에는 대출신청 후 한참 있다가 서고에서 나온 책을 찾아가는 폐가식(閉架式)이어서 책 빌리는 게 세상없이 귀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키워보니 책은 바로 곁에 있어야 하고 또 다 본 후 제자리에 갖다 꽂으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아야 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여름 더위는 정말 대단했다. 오전부터 주민들이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도서관으로 찾아 들어왔다. 평소 보이던 단골들이 아니라 그런지 열람실에는 시시때때로 카톡 소리, 전화벨 소리가 들리고, 어떤 이는 도서관이 처음이었는지 평소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하다가 사서의 제지를 받고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밖으로 나갔다.

신경 날카롭던 나는 급기야 포장된 복숭아 상자를 들고 입장하는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제풀에 허물어져 웃고 말았다. 하긴, 뭐 그리 까다롭게 굴 것 있나. 도서관은 책을 보는 곳이지만 이런 식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었다.

이제는 적응이 되어 한두 번 실수로 울리는 벨쯤은 신경 쓰지도 않고 누군가 통화하거나 카톡 소리가 계속되면(주로 귀가 어두운 노인분 폰이다) 듣기 싫지 않게 의사를 전달할 줄도 알게 되었다. 독서실에서 예비군 바지 입고 질서 유지에 조력하는 장수생들처럼 어느새 터주가 되어가나 보다.

외견상 또는 기능상 도서관과 가장 비슷한 곳은 서점이다. 가끔 시내에서 약속시간이 약간씩 남을 때 습관적으로 들어가 시간 보내는 곳이 서점인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서점에서는 어수선해서 책이 읽히던가? 나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책은 펼쳐 들었으되 글씨에는 초점이 모이지 않는 것 같다. 어떤 때는 무료함과 불안의 그늘이 읽힌다. 애초부터 존재의 목적이 다른 두 장소다.

TV에서 김영하 작가가 그랬던가,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사놓은 책 가운데 골라 읽는 것이라고. 서점은 책을 비축하기 위해, 안 읽기 위한 책을 사기 위해 들르는 곳이고 도서관은 읽을 책을 고르기 위해 들르는 곳 아닐까.

도서관에서는 살만한 책을 고를 수 있어 좋다. 열권 넘게 뽑아 조금씩 살펴봐야 비로소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는데, 그때부터는 열심히 읽다가 결국 온라인 서점에서 그 책을 주문하게 된다. 그래야 마음 놓고 밑줄 긋거나 책장을 접거나 인터넷으로 찾아낸 내용을 여백에 써넣을 수 있으니까.

내가 볼 때 사서들은 자리에 앉아 컴퓨터로 대출이나 반납업무를 처리하고 책들을 제자리에 꽂는 일을 하던데, 어느 소설에서 보니 상한 책 수선하고, 찢어진 페이지는 복사해다 붙이고, 미반납자에게 전화하고, 하여튼 바깥에서 보기보다 훨씬 일이 많은가보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마는 제3자의 눈에는 그런 업무조차 참 여유롭고 평화롭게 느껴진다. 늦가을 햇살이 오래된 플라타너스 잎을 뚫고 들어오는, 낡은 도서관의 오후 정취 때문일지도 모른다.

/ 박헌정 여행가·수필가 portugal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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