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출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람책’

매체명 : 서울& 보도일 : 2018.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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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ouland.com/arti/society/society_general/4080.html
대출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람책’

“2011년 케이블 가설 공사를 하러 어떤 건물 옥상에 가보니 전부 비어 있는 거예요. 그때 이 공간을 푸르게 만들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19일 노원구 상계동의 노원 정보도서관 건물 지하 1층에 자리잡은 노원휴먼라이브러리에서 이은수(55) 노원도시농업네트워크 대표가 도시농업을 시작한 계기를 말하다 잠시 숨을 고른다. 이 대표는 이어 옥상에서 시작한 농사가 텃밭으로 이어진 일과, 빗물을 이용해 음식물 쓰레기를 퇴비화하고, 버섯 재배와 굼벵이 사육으로까지 확장하며 도시농업 전문가로 성장한 과정을 충실히 설명했다.

평소 수백 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을 하는 이 대표지만, 이날은 딱 한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원휴먼라이브러리에 등록된 ‘사람책’인 이 대표가 이날 ‘대출’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책이 돼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삶의 경험을 ‘대출 신청자’에게 들려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책’은 독서의 계절인 이번 가을, 책을 만나는 색다른 방법 중 하나다.

사람책은 덴마크의 사회운동가 로니 아베르겔(45)이 2000년대 시작한 운동이다. 아베르겔은 1993년 덴마크 코펜하겐 시내에서 친구인 10대 청소년이 사소한 말다툼 끝에 칼에 찔려 숨지는 사건을 본 뒤, 폭력과 편견을 없애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는 ‘진솔한 대화가 폭력과 편견을 없앤다’는 생각으로 2000년 한 음악축제에서 4만 명이 참여한 대화 프로그램을 성공시킨다. 이 행사가 전 세계로 퍼져나간 ‘휴먼라이브러리’ 운동의 출발이 됐다. 이후 유럽에서는 무슬림·성소수자 등 편견의 피해자들이 사람책이 돼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잘못된 사회적 시각을 깨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국회도서관이 처음 시작한 뒤 서울시의 각 공공 도서관이나 시민단체 등에서 비정기적으로 운용하다가, 노원휴먼라이브러리가 2012년 3월부터 첫 상설 사람책 도서관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임미경(48) 노원휴먼라이브러리 관장은 “사람책은 애초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의 하나로 ‘노원구민들이 서로를 알아가자’는 취지로 시작했다”며 “지금은 청소년 진로 상담, 경력단절여성 재취업, 중·장년층의 직업 전환이나 인생 2모작 모색 등과 관련해 이용률이 높다”고 말한다.

지난 9월30일 현재 노원휴먼라이브러리에 등록된 사람책은 모두 761명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에 따라 이웃·커뮤니티, 금융·재테크, 봉사활동, 공무원, 취미·힐링·여가 등 19개 카테고리로 분류돼 ‘대출’을 기다린다. 모두 무보수로 봉사하며, 다만 해당 시간만큼 자원봉사 시간으로 인정받는다. 사람책 목록은 노원휴먼라이브러리 누리집(www.humanlib.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상훈(45) 노원휴먼라이브러리 사서는 “홈페이지(누리집)에 등재된 사람책을 ‘대출’ 신청하면, 노원휴먼라이브러리 관계자가 사람책과 독자의 시간을 조정해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한다”고 설명한다. ‘대출’은 보통 4~10명이 한 그룹이 되어 한 명의 사람책을 신청하지만, 신청자가 한 사람이어도 가능하다. 대출은 휴먼라이브러리 도서관에서만 이루어지고, 1회 대출 시간은 50분이다.

이날도 ‘팟캐스트, 마을라디오 DJ가 되어 보세요’를 주제로 등록한 우귀옥(63) 마을공동체라디오 노원FM 대표, 오랫동안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해온 김점옥(59) 간호사, 학생들의 독서와 토론지도 전문가인 신유정(51) 강사 등이 노원휴먼라이브러리에 나왔다.

임미경 관장은 “올해만 해도 모두 3650명이 247명의 사람책을 대출했다”며 “공무원·경찰·간호사·유치원 선생님 등 직업과 관련한 사람책들이 스테디셀러”라고 한다. 임관장은 “노원구민이 아니라도 서울 시민이면 누구나 사람책 대출 신청을 할 수 있다”고 대출 신청 자격도 덧붙여 밝혔다.

현재 서울시에는 노원휴먼라이브러리 외에도 성북휴먼라이브러리와 서울시립대 휴먼라이브러리가 상설 운영되고 있다. 260여 명의 사람책을 보유하고 있는 성북휴먼라이브러리에서는 2015년까지는 노원휴먼라이브러리처럼 ‘직접 대출 방식’으로 운영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개별 대출은 하지 않고 사람책을 팟캐스트 형식으로 인터뷰해서 누리집(www.sblib.seoul.kr)에 올리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더 많은 사람이 사람책을 보게 하려는 시도다.

사회·문화 단체에서 진행하는 각종 행사 때에도 사람책을 만날 수 있다. 10월27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어울림광장에서 열리는 제2회 50플러스축제도 그중 하나다. 이번 축제의 프로그램인 ‘일자리도서관’에서는 마을활동가, 숲해설가, 연극인, 기업인 등 16명의 사람책이 나와 취업이나 봉사 등 ‘뜻깊은 50플러스 삶’에 대해 조언해준다. 가령 16명의 사람책 중 한 사람인 김용표 협치도봉구회의 의장은 ‘사장까지 역임했던 30년 기업 재직 경험’과 그 이후 청소년자원봉사교육강사단 활동 등을 바탕으로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들려준다.

임미경 관장은 사람책이 우리 사회에서 더욱 확산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인터넷이나 활자 책 등 지식 정보가 많이 늘어났지만, 사람책은 자기 삶의 흔적에 대해, 실패나 성공 원인에 대해 대출자와 눈빛을 교환하면서 이야기를 전달하기 때문에 전달력이 크다”고 강조했다. 제2회 50플러스축제의 일자리도서관을 진행하는 50플러스재단 오정민 피엠(PM·프로그램 매니저)도 “50플러스 세대인 사람책이 행사 참가자에게 본인의 사례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공감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사실 시민 개개인의 삶이 점차 다양해지는 현실도 사람책의 효용가치를 높인다. 자신의 이야기를 활자 책으로 펴낼 정도로 유명하지는 않더라도, 각 개인의 풍성한 경험은 사회의 동료나 후배에게 소중한 자료와 경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원휴먼라이브러리의 사람책인 이은수 대표처럼 “글은 잘 못 쓰지만, 말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는 자신이 있는” 사람이 매우 많다는 점도 사람책이라는 포맷의 필요성을 높이는 부분이다.

무보수 자원봉사가 대부분이지만, 사람책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노원휴먼라이브러리의 사람책인 김점옥 간호사는 “사람책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더욱더 익어가는 경험”을 한다. 사람책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떠한 선택과 활동을 했고, 왜 했는지를 정리해야 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 관장은 따라서 정규 도서관이나 큰 행사 때가 아니라도 사람책을 다양하게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가령 공동육아를 하는 모임에서 부모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사람책이 돼 자신들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일도 좋을 것 같다는 것이다. 또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사람책이 돼 아이들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사제 간의 신뢰도 훨씬 높아질 듯하다.

우리가 더 많은 사람을 ‘사람책’으로 만날 때, 이 가을이 더욱 풍성하게 다가올 것으로 기대된다.

/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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