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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내 정신의 영토에 쌓아올린 ‘못읽은 책’들의 왕국
매체명 : 한겨례
보도일 : 2018.09.21
내 정신의 영토에 쌓아올린 ‘못읽은 책’들의 왕국
읽을 책 수백권 순위경쟁 변덕
이런 상황 고민보단 즐거움이길
‘취향의 도서관’서 즉석만남도
‘읽고픈 책’은 숙제 아닌 가능성
이번 추석 연휴에는 미국 작가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를… 읽을 계획이다. 아마도.
스마트폰의 메모장 앱에서 내가 자주 수정하는 문서가 하나 있는데, ‘읽을 책’ 항목의 문서들이다. 신문 서평을 읽거나 웹서핑을 하다가, 서점이나 도서관을 거닐다가, 관심이 가는 서적을 발견하면 제목과 저자를 이 항목에 메모해둔다. 그렇게 목록에 올려둔 책이 백 권은 확실하게 넘고, 천 권은 안 될 것 같다.
그 수백 권의 도서들이 거기서 경쟁을 벌인다. 딱히 번호를 매기는 건 아니지만 마음속에서 ‘읽지 않았지만 읽고 싶은 서적들의 순위’가 인기차트처럼 수시로 바뀐다. <사랑의 역사>는 그 순위에서 늘 상위권에 있기는 한데, 한번도 1위를 해본 적이 없다.
시집 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 놀러갔다가 서점 주인인 유희경 시인에게 “소설 한 권 추천해주세요”라고 했더니 그가 건넨 단행본이 이 책이었다. 계산대에서 유 시인은 “다 읽고 마음에 들면 감상평을 짧게 문자메시지로 보내주세요”라고 부탁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게 2년 전이다.
관심이 없었다면 멀찍이 치워버렸을 텐데, 그렇진 않다. 흥미롭다. 읽고 싶다. 그런데 계속 ‘조만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정작 손에 잡질 못하고 있다. 조만간 읽어야지, 읽어야지, 당장은 아니고, 다음에, 다음에.
변명을 하자면, 우선 몇년 전부터 전자책에 맛을 들이면서 종이책을 멀리하게 됐다. 요즘은 책을 거의 대부분 전자책으로 읽는다. 종이책의 물성이나 질감은 잘 모르겠고, 전자책은 글자 크기와 줄 간격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다. 나는 작은 글자를 오래 못 읽는다.
게다가 <사랑의 역사>는 358쪽짜리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기왕이면 한 호흡으로 읽고 싶다. 300쪽 이내라면 부담 없이 시작해서 끝을 볼 것 같고, 400쪽이 넘는다면 한번에 읽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역시 부담 없이 집어들 것 같다. 그런데 358쪽은 좀 애매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자 프로필이 살짝 고깝다. 책날개에는 ‘분더킨트로 통한다’고 고상한 표현으로 적혀 있지만…. 그래, 문학 신동, 소설 천재라 이거지. 크라우스는 십대에 문학에 빠지고 스탠퍼드를 졸업하고 옥스퍼드에서 논문 쓰고 20대에 시인으로 등단하고 미술을 공부했으며 스물여덟에 발표한 첫 소설이 언론에서 올해의 책으로 뽑혔다.
서른살에 두 번째 소설 일부를 잡지에 싣자마자 뉴욕 문단에서 큰 화제가 되고, 책이 나오자 모든 문예지가 다루고, 유명 감독이 영화로 만들겠다고 나서고, 35개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단다. 작가는 역시 신동으로 불린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결혼해 미국 문학계의 스타 부부가 되기도 한다. 나중에 헤어지긴 하지만. 이쯤 되면 저자 이력 자체가 무슨 판타지 소설 같다.
크라우스의 바로 그 두 번째 소설이 <사랑의 역사>다. 문학천재 뉴요커가 서른에 쓴 작품이라니, 어떤 삶의 질곡이 담겨 있을지, 서울 구로구 주민의 마음도 흔들 수 있을지, 매번 책을 집어 들기 직전에 망설여진다. ‘어디 간이나 한번 볼까’ 하고 책장 중간을 펼쳤는데 하필 양면이 거의 백지였다. 44~50쪽까지 일곱 쪽에 걸쳐 한 페이지에 한 줄 혹은 한 문단만 있다. 이거 예술쟁이의 너무 뻔한 허세 아닌가? 장르가 소설이 아니라 감성 에세이인가?
그럼에도 ‘이 책 조만간 꼭’이라며 벼르는 이유는, 먼저 다른 사람들의 추천 때문이다. 해외 문인들의 추천사는 ‘이거 실화냐?’고 되묻고 싶을 정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존 쿳시가 “너무나도 독창적인 소설”이라며 추켜세웠다. 수전 손택은 새파란 후배인 크라우스가 “이제 미국 문학사의 주요 작가로 떠올랐다”고 했다. 무엇보다 나는 유희경 시인의 안목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는 초창기부터 내 글을 좋아해준 독서가다.
미국에서 책이 나온 2005년은 그럭저럭 동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시간이고, 저자가 나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묘한 의무감도 생긴다. 세계문학의 중심부에서 내 또래 작가가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어떤 작품이 각광받는지 확인하고 싶다.
소설 내용도 궁금하다. 책 뒤표지 소개에 따르면 <사랑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라는 수수께끼의 소설을 둘러싸고 여러 등장인물이 얽히는 줄거리인 모양이다. 로맨스에 미스터리 요소가 섞였나 보다. 언뜻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 생각나는데, 나는 그 책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칼럼 첫 문장에서 ‘이번 추석 연휴에는 <사랑의 역사>를 읽을 계획이다’라는 문장 중간에 말줄임표를 넣었다. 뒤에는 ‘아마도’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다른 후보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강력한 경쟁자는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안티프래질>과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안티프래질>은 해외 언론의 어마어마한 호평을 받았고, <너의 췌장을…>은 화제성이 대단하다. 라이트노벨에 대해 개인적인 호기심도 있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하나? 변태처럼 들리지 않을까 좀 두려운데, 나는 사실 이런 상황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는 편이다.
과연 어떤 책이 최후의 순간 나의 간택을 받을 것인가? 내가 쌓아 올린 ‘읽지 않았지만 읽고 싶은 책들의 왕국’에서는 내가 왕이고 대통령이고 슈퍼스타다. 스마트폰 문서의 목록을 훑어볼 때면 좋은 책들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 온다. 자신을 읽어 달라고. 그런데 이 왕국에서 나는 상당히 ‘나쁜 남자’라, 별 이유도 없이 유력 후보들을 물리치고 우연한 즉석 만남을 즐기기도 한다. 고로 이번 추석에 저 위의 세 권이 아닌 엉뚱한 다른 책을 펼칠지도 모른다.
이런 왕국을 각자 세우면 어떨까. 우리 모두.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을 써보는 것만으로도 당신 한 사람을 위한 정신의 영토, 취향의 도서관이 탄생한다. 탐색하고 고르는 일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고, 해보면 꽤 즐겁다. 읽고 싶은 책들을 숙제가 아니라 가능성이라고 여기는 것이 시작이다.
참고. 이 왕국은 한번 건설하면 땅덩이가 끝없이 확장된다. 아시다시피, 읽고 싶은 책들은 읽은 책보다 언제나 훨씬 더 빠르게 늘어난다.
장강명 소설가
가여운 책들아, 너희 잘못 아니야
책장의 구조부터 설명해야겠다. 높고 널찍한 세 개의 책장에 분야별로 책을 꽂아두었다. 인문, 철학, 과학, 우주, 예술, 한국 소설, 외국 소설…, 이런 식으로. 책장의 위에서 세 번째 칸에는 작은 책꽂이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여긴 분야와 상관없는 특별 책장이다. 왼쪽엔 최근에 산 책, 오른쪽에는 곧 읽을 책과 읽어야 할 책을 모아두었다. 책을 구입하면 제일 먼저 최근에 산 책 코너에 꽂았다가 ‘읽어야 할 책’으로 옮겼다가 시간이 지나면 분야별 책장으로 보낸다. ‘최근에 산 책’에 책이 쌓이는 걸 막기 위해서는 책 구입을 자제해야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책을 보면 읽고 싶고, 잠깐 읽다 보면 사게 되고, 사고 보면 이미 산 책인 때도 있고, 사고 나서 놓아두기만 하는 적도 많고, 그러다보니 읽어야 할 책은 쌓여만 가고, 쌓인 책을 보면 이미 때 지난 책 같아서 새로운 책을 보고 싶어지고, 새로운 책을 보면 읽고 싶고, 잠깐 읽다 보면 …. 이런 반복이 반복되다보면 책이 늘어날 수밖에 없지.
지금도 열몇 권의 책이 ‘읽어야 할 책’ 코너에 쌓여 있고, ‘최근에 산 책’은 그보다 더 많다. 이들 중에? 완독까지 이르는 책은 30퍼센트도 안 된다. 10권 중 7권은 중간에 낙오하고 마는 것이다. 낙오라고 해봤자 분야별 책장으로 가는 것뿐이지만, 그리고 나중에 한 번쯤은 자료로 다시 쓰이겠지만, 그들의 상실감은 몹시 클 것이다. 어째서 나는 완독당하지 못한 것일까, 뭐가 문제일까? 디자인일까, 번역일까, 문장일까, 구조일까, 내용일까. 북엔드에 기대서, 비좁은 책꽂이에서 다른 책들과 어깨를 비벼가면서 평생 이런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가여운 책들아,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나의 변덕 때문이지. 관심이 계속 바뀌고, 문장에 대한 취향도 자주 변하고, 집중력은 줄어들고, 경제력은 그나마 예전보다는 나아졌기 때문이지.
예전보다 나아진 경제력 때문에 책 구입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하나의 주제에 꽂히면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산다. 그 세계를 모두 알고 싶다. A부터 Z까지, 기초에서 심화까지, 기본에서 응용까지 모두 파악하고 싶다. 같은 주제의 책을 여러 권 읽다가 문득 깨닫게 된다. ‘아, 이 분야에는 내가 흥미로워할 만한 것이 많지 않구나.’ 책을 여러 권 샀는데, 깨달음은 뒤늦게, 사기꾼처럼 온다. 다른 경우도 있다. ‘이 주제를 완전히 파악하려면 끝판왕까지 가야 하는구나, 최고로 높은 산을 넘어야 갈증이 해소되겠구나’.
올해 초부터 ‘트랜스휴머니즘’에 관심이 생겼고,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 이제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가 남았다. 책 가격은 3만5천 원, 페이지 수는 840이다. 끝판왕답다. 주제의 끝이 아니라 분량의 끝이 될 것이다. 과연 나는 이 책을 완독하게 될까. 이 주제에 더 매달리게 될까, 다음 주제로 넘어갈까. 840페이지에 코를 파묻은 채 시간을 보내게 될까, 아니면 기다리고 있는 다른 책으로 손을 뻗을까. <특이점이 온다>의 표지에 적혀 있는 대로라면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 특이점이 온다는데, 세상은 곧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는데, 이 책이 바로 우리의 미래라는데,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데, ‘인간은 기계가 되고 기계는 인간이’ 되는 세상이 머지않았다는데, 나는 아직도 여전히 책을 읽고 있다.
/ 김중혁 소설가
읽을 책 수백권 순위경쟁 변덕
이런 상황 고민보단 즐거움이길
‘취향의 도서관’서 즉석만남도
‘읽고픈 책’은 숙제 아닌 가능성
이번 추석 연휴에는 미국 작가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를… 읽을 계획이다. 아마도.
스마트폰의 메모장 앱에서 내가 자주 수정하는 문서가 하나 있는데, ‘읽을 책’ 항목의 문서들이다. 신문 서평을 읽거나 웹서핑을 하다가, 서점이나 도서관을 거닐다가, 관심이 가는 서적을 발견하면 제목과 저자를 이 항목에 메모해둔다. 그렇게 목록에 올려둔 책이 백 권은 확실하게 넘고, 천 권은 안 될 것 같다.
그 수백 권의 도서들이 거기서 경쟁을 벌인다. 딱히 번호를 매기는 건 아니지만 마음속에서 ‘읽지 않았지만 읽고 싶은 서적들의 순위’가 인기차트처럼 수시로 바뀐다. <사랑의 역사>는 그 순위에서 늘 상위권에 있기는 한데, 한번도 1위를 해본 적이 없다.
시집 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 놀러갔다가 서점 주인인 유희경 시인에게 “소설 한 권 추천해주세요”라고 했더니 그가 건넨 단행본이 이 책이었다. 계산대에서 유 시인은 “다 읽고 마음에 들면 감상평을 짧게 문자메시지로 보내주세요”라고 부탁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게 2년 전이다.
관심이 없었다면 멀찍이 치워버렸을 텐데, 그렇진 않다. 흥미롭다. 읽고 싶다. 그런데 계속 ‘조만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정작 손에 잡질 못하고 있다. 조만간 읽어야지, 읽어야지, 당장은 아니고, 다음에, 다음에.
변명을 하자면, 우선 몇년 전부터 전자책에 맛을 들이면서 종이책을 멀리하게 됐다. 요즘은 책을 거의 대부분 전자책으로 읽는다. 종이책의 물성이나 질감은 잘 모르겠고, 전자책은 글자 크기와 줄 간격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다. 나는 작은 글자를 오래 못 읽는다.
게다가 <사랑의 역사>는 358쪽짜리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기왕이면 한 호흡으로 읽고 싶다. 300쪽 이내라면 부담 없이 시작해서 끝을 볼 것 같고, 400쪽이 넘는다면 한번에 읽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역시 부담 없이 집어들 것 같다. 그런데 358쪽은 좀 애매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자 프로필이 살짝 고깝다. 책날개에는 ‘분더킨트로 통한다’고 고상한 표현으로 적혀 있지만…. 그래, 문학 신동, 소설 천재라 이거지. 크라우스는 십대에 문학에 빠지고 스탠퍼드를 졸업하고 옥스퍼드에서 논문 쓰고 20대에 시인으로 등단하고 미술을 공부했으며 스물여덟에 발표한 첫 소설이 언론에서 올해의 책으로 뽑혔다.
서른살에 두 번째 소설 일부를 잡지에 싣자마자 뉴욕 문단에서 큰 화제가 되고, 책이 나오자 모든 문예지가 다루고, 유명 감독이 영화로 만들겠다고 나서고, 35개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단다. 작가는 역시 신동으로 불린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결혼해 미국 문학계의 스타 부부가 되기도 한다. 나중에 헤어지긴 하지만. 이쯤 되면 저자 이력 자체가 무슨 판타지 소설 같다.
크라우스의 바로 그 두 번째 소설이 <사랑의 역사>다. 문학천재 뉴요커가 서른에 쓴 작품이라니, 어떤 삶의 질곡이 담겨 있을지, 서울 구로구 주민의 마음도 흔들 수 있을지, 매번 책을 집어 들기 직전에 망설여진다. ‘어디 간이나 한번 볼까’ 하고 책장 중간을 펼쳤는데 하필 양면이 거의 백지였다. 44~50쪽까지 일곱 쪽에 걸쳐 한 페이지에 한 줄 혹은 한 문단만 있다. 이거 예술쟁이의 너무 뻔한 허세 아닌가? 장르가 소설이 아니라 감성 에세이인가?
그럼에도 ‘이 책 조만간 꼭’이라며 벼르는 이유는, 먼저 다른 사람들의 추천 때문이다. 해외 문인들의 추천사는 ‘이거 실화냐?’고 되묻고 싶을 정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존 쿳시가 “너무나도 독창적인 소설”이라며 추켜세웠다. 수전 손택은 새파란 후배인 크라우스가 “이제 미국 문학사의 주요 작가로 떠올랐다”고 했다. 무엇보다 나는 유희경 시인의 안목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는 초창기부터 내 글을 좋아해준 독서가다.
미국에서 책이 나온 2005년은 그럭저럭 동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시간이고, 저자가 나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묘한 의무감도 생긴다. 세계문학의 중심부에서 내 또래 작가가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어떤 작품이 각광받는지 확인하고 싶다.
소설 내용도 궁금하다. 책 뒤표지 소개에 따르면 <사랑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라는 수수께끼의 소설을 둘러싸고 여러 등장인물이 얽히는 줄거리인 모양이다. 로맨스에 미스터리 요소가 섞였나 보다. 언뜻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 생각나는데, 나는 그 책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칼럼 첫 문장에서 ‘이번 추석 연휴에는 <사랑의 역사>를 읽을 계획이다’라는 문장 중간에 말줄임표를 넣었다. 뒤에는 ‘아마도’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다른 후보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강력한 경쟁자는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안티프래질>과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안티프래질>은 해외 언론의 어마어마한 호평을 받았고, <너의 췌장을…>은 화제성이 대단하다. 라이트노벨에 대해 개인적인 호기심도 있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하나? 변태처럼 들리지 않을까 좀 두려운데, 나는 사실 이런 상황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는 편이다.
과연 어떤 책이 최후의 순간 나의 간택을 받을 것인가? 내가 쌓아 올린 ‘읽지 않았지만 읽고 싶은 책들의 왕국’에서는 내가 왕이고 대통령이고 슈퍼스타다. 스마트폰 문서의 목록을 훑어볼 때면 좋은 책들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 온다. 자신을 읽어 달라고. 그런데 이 왕국에서 나는 상당히 ‘나쁜 남자’라, 별 이유도 없이 유력 후보들을 물리치고 우연한 즉석 만남을 즐기기도 한다. 고로 이번 추석에 저 위의 세 권이 아닌 엉뚱한 다른 책을 펼칠지도 모른다.
이런 왕국을 각자 세우면 어떨까. 우리 모두.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을 써보는 것만으로도 당신 한 사람을 위한 정신의 영토, 취향의 도서관이 탄생한다. 탐색하고 고르는 일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고, 해보면 꽤 즐겁다. 읽고 싶은 책들을 숙제가 아니라 가능성이라고 여기는 것이 시작이다.
참고. 이 왕국은 한번 건설하면 땅덩이가 끝없이 확장된다. 아시다시피, 읽고 싶은 책들은 읽은 책보다 언제나 훨씬 더 빠르게 늘어난다.
장강명 소설가
가여운 책들아, 너희 잘못 아니야
책장의 구조부터 설명해야겠다. 높고 널찍한 세 개의 책장에 분야별로 책을 꽂아두었다. 인문, 철학, 과학, 우주, 예술, 한국 소설, 외국 소설…, 이런 식으로. 책장의 위에서 세 번째 칸에는 작은 책꽂이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여긴 분야와 상관없는 특별 책장이다. 왼쪽엔 최근에 산 책, 오른쪽에는 곧 읽을 책과 읽어야 할 책을 모아두었다. 책을 구입하면 제일 먼저 최근에 산 책 코너에 꽂았다가 ‘읽어야 할 책’으로 옮겼다가 시간이 지나면 분야별 책장으로 보낸다. ‘최근에 산 책’에 책이 쌓이는 걸 막기 위해서는 책 구입을 자제해야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책을 보면 읽고 싶고, 잠깐 읽다 보면 사게 되고, 사고 보면 이미 산 책인 때도 있고, 사고 나서 놓아두기만 하는 적도 많고, 그러다보니 읽어야 할 책은 쌓여만 가고, 쌓인 책을 보면 이미 때 지난 책 같아서 새로운 책을 보고 싶어지고, 새로운 책을 보면 읽고 싶고, 잠깐 읽다 보면 …. 이런 반복이 반복되다보면 책이 늘어날 수밖에 없지.
지금도 열몇 권의 책이 ‘읽어야 할 책’ 코너에 쌓여 있고, ‘최근에 산 책’은 그보다 더 많다. 이들 중에? 완독까지 이르는 책은 30퍼센트도 안 된다. 10권 중 7권은 중간에 낙오하고 마는 것이다. 낙오라고 해봤자 분야별 책장으로 가는 것뿐이지만, 그리고 나중에 한 번쯤은 자료로 다시 쓰이겠지만, 그들의 상실감은 몹시 클 것이다. 어째서 나는 완독당하지 못한 것일까, 뭐가 문제일까? 디자인일까, 번역일까, 문장일까, 구조일까, 내용일까. 북엔드에 기대서, 비좁은 책꽂이에서 다른 책들과 어깨를 비벼가면서 평생 이런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가여운 책들아,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나의 변덕 때문이지. 관심이 계속 바뀌고, 문장에 대한 취향도 자주 변하고, 집중력은 줄어들고, 경제력은 그나마 예전보다는 나아졌기 때문이지.
예전보다 나아진 경제력 때문에 책 구입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하나의 주제에 꽂히면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산다. 그 세계를 모두 알고 싶다. A부터 Z까지, 기초에서 심화까지, 기본에서 응용까지 모두 파악하고 싶다. 같은 주제의 책을 여러 권 읽다가 문득 깨닫게 된다. ‘아, 이 분야에는 내가 흥미로워할 만한 것이 많지 않구나.’ 책을 여러 권 샀는데, 깨달음은 뒤늦게, 사기꾼처럼 온다. 다른 경우도 있다. ‘이 주제를 완전히 파악하려면 끝판왕까지 가야 하는구나, 최고로 높은 산을 넘어야 갈증이 해소되겠구나’.
올해 초부터 ‘트랜스휴머니즘’에 관심이 생겼고,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 이제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가 남았다. 책 가격은 3만5천 원, 페이지 수는 840이다. 끝판왕답다. 주제의 끝이 아니라 분량의 끝이 될 것이다. 과연 나는 이 책을 완독하게 될까. 이 주제에 더 매달리게 될까, 다음 주제로 넘어갈까. 840페이지에 코를 파묻은 채 시간을 보내게 될까, 아니면 기다리고 있는 다른 책으로 손을 뻗을까. <특이점이 온다>의 표지에 적혀 있는 대로라면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 특이점이 온다는데, 세상은 곧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는데, 이 책이 바로 우리의 미래라는데,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데, ‘인간은 기계가 되고 기계는 인간이’ 되는 세상이 머지않았다는데, 나는 아직도 여전히 책을 읽고 있다.
/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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