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도서관 뉴스
[미국]연착된 지하철이 도착하자 벌어진 일
매체명 : 오마이뉴스
보도일 : 2018.07.17
연착된 지하철이 도착하자 벌어진 일
[타박타박 아홉걸음 세계일주 46] 뉴욕의 공공도서관과 브라이언트 파크
아무 걱정하지마 아무 생각하지마
아무 것도 아닌 걸 알게 될거야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도 괜찮아
아무 것도 아닌 걸 알게 될거야
- 펑크파인애플, 'I am okay' 노랫말 중에서
"나는 도서관을 만들고 싶습니다."
어른이 되고 난 후에도 나는 늘 꿈을 말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다.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없어요'이기 때문에, '선생님 꿈은 이거야'라고 내가 먼저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한다.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내 꿈이다. 게다가 배운 게 도둑질이고 직업이 그렇다보니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든 도서관이 근처에 있다면 항상 들른다. 공공 도서관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는 항상 내 관심사 중의 하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도서관은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시립 도서관이었다. 스톡홀름은 북유럽의 역사 때문인지 도착하기 전부터 그다지 정이 안 가는 곳이었다. 스톡홀름 구시가지에 있는 건물들도 예쁘다기 보다는 고압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이곳 맨해튼의 마천루가 그렇듯이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서 있는 그 고압적인 모습에 그다지 정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지도를 보고 찾아갔던 스톡홀름 시립 도서관에 들어섰을 때 나는 단순한 감동 이상의 큰 충격을 받았다. 도서관이 이럴 수도 있구나. 이런 도서관이 있는 곳이라면 오랫동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 하나가 그 도시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순간이었다. 이후로도 나는 스톡홀름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그 원형 도서관 서가를 마주했을 때 내 피부에 돋아났던 그 소름들이다.
뉴욕 공공 도서관은 스톡홀름처럼 압도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도서관 안에 겹겹이 쌓인 역사와 기품은 스톡홀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뉴욕 시립 도서관의 열람실에 들어서는 순간 열람실 특유의 밀도가 높은 무거운 공기가 긴 세월을 보낸 시간의 중후함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함마저 풍기고 있었다.
뉴욕의 매력에 푹 빠지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 비싼 물가,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교통체증, 하늘을 가린 고층 빌딩에 둘러 싸인 맨해튼에 사는 뉴요커들이 순식간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나 혼자만 알고 싶다는 쓸데 없는 욕심도 생겼고, 그럴싸한 도서관이 없는 호치민이 원망스러워졌다. 물론 직접 나서 찾아본 적이 없어서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1895년에 설립된 'NYPL'은 1911년에 준공된 현재의 뉴욕 공공 도서관 건물을 포함해서 인근 88개의 작은 도서관을 연계하고 4개의 학술센터를 운영하는 단체다. 이름이 'Public'이지만 주 정부가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NYPL'에서 공공 기금과 개인들의 기부금만으로 운영한다고 했다. 지난 100년 동안 이렇게 성장했으니 앞으로의 100년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갈지 도서관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눈여겨 보면 좋겠다.
특히 최근에는 공공 와이파이와 디지털 자료 확충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여전히 뉴욕 가정의 1/3은 인터넷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정보 격차를 줄이는 것이 당면 과제이기 때문이란다. 집에 인터넷이 안 되는 가정은 대체로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된 취약 계층이 대부분일 것이다. 핵심 과제가 그들의 정보 격차를 줄이는 것이라니, 나는 뉴욕의 이민자도 아닌데 그들의 의제 선정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뉴욕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도서관을 나온 뒤에 더 커졌다. 도서관 뒷편에는 브라이언트 파크(Bryant Park)가 있었다. 브라이언트 파크 역시 주 정부에서 운영하지 않고 공원 운영을 독립된 민간 재단에서 독자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공원과는 운영 방식도 다르고 이곳만의 색깔이 분명한 곳이었다. 일년 내내 다양한 축제와 공연이 이어지고 모든 공연은 전부 무료다. 센트럴 파크에 비하면 정말 작고 아담한 곳이지만 처음 이 공원에 왔을 때부터 오랜 친구를 맨해튼 한복판에서 만난 것처럼 반가웠고, 첫 만남에서 정이 들어버렸다.
맨해튼 사람들은 이렇게 지내는구나. 그들의 삶을 살짝 엿본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열려 있는 곳. 뉴욕에서는 드물게 깨끗한 공공 화장실이 있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 와이파이가 있고, 공원 곳곳에 전자기기를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도 있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사람들보다 더 많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잔디밭에 드러누우면 하늘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 브라이언트 파크였다. 인도 위를 걸을 때에도 고속도로 위의 자동차처럼 걷는 뉴요커들이 이곳에서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각자 준비한 도시락을 먹고 잔디를 베고 누워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 'I Love NY'란 문장을 대문짝만하게 가슴에다 새기고 다니는구나 싶었다.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어느 비오는 날의 일이었다. 공원을 걸으며 콘센트를 꽂을 만한 곳이 없는지 살펴 보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뉴욕 날씨는 정말 매일매일 종잡을 수가 없어서 갑자기 떨어지는 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서관 안으로 비를 피해 걸어가고 있는데 공원 테이블 위에 커다란 LCD 모니터를 놓고 유유히 신문을 읽고 있는 아저씨가 있었다. 까만 우산을 한손에 들고 노트북과 모니터를 연결한 후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남은 한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에서 디지털 노마드의 포스가 강렬하게 풍겼다. 브라이언트 파크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었다.
이후로 맨해튼에 나와서 시간이 남으면(여행자에게는 넘치는 게 시간이다) 언제나 브라이언트 파크와 뉴욕 공공 도서관을 찾았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은 몇 블럭을 걷더라도 항상 이곳에 와서 먹었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인들의 공연 소리를 들으며 공원 테이블에 앉아 있다. 뉴욕에서 매일매일 미술관에 가는 게 목표였는데 미술관에 안 가는 날에도 도서관에는 왔다.
마침 도서관 근처에 지하철 N 노선이 있어서 숙소가 있는 아스토리아까지 한번에 갈 수 있었다. 뉴욕 지하철은 24시간 운행이라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해가 뜨거운 한낮에는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있다가 폐관 시간이 되면 챙겨들고 나와서 공원에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Private'으로 둘러싸인 맨해튼 한가운데 있는 'Public'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고 있었다.
뉴욕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아이들이 우스갯소리로 "선생님, 뉴욕에 도착하면 총부터 사세요"라고 했다. 이미 NIE 수업시간에 미국의 총기사고에 대한 이야기와 대책에 대해 토론한 적도 있었다.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갖는 이미지가 나라고 뭐 달랐을까. 뉴욕 땅을 밟은 첫날 호스트 수잔 할머니에게도 질문을 했다.
"수잔, 밤에 혼자 다니면 위험해요?"
"(당황해하며) 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야. 밤 늦게 혼자 다니는 것이 완전하게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네가 사람들의 어깨를 일부러 치고 다니거나 욕을 하지 않는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아. 이 동네(아스토리아)에 살면서 위험하다고 느낀 적은 없어."
밤에 혼자 다니면 위험하냐고 묻다니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전세계 어디든 이방인인 여행자가 밤늦게 혼자 다니면 그건 항상 위험한 일이다.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면 그게 어느 나라가 됐든 주변에서 안전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는데 사실 한국이라고 해서 범죄의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한 대비와 경계는 언제 어디서든 꼭 필요한 것이다.
다만 겨우 보름이지만 지금까지 뉴욕에 지내면서 특별히 불쾌한 경험을 하지는 않았다. 나도 지금까지 꽤 많은 나라와 도시들을 다녀서 경험이 적다고 할 수는 없는데, 뉴욕은 그 중에서도 유난히 여행자의 존재감이 적었다.
여행자는 어디서든 어떤 식으로든 인파 속을 걸어도 눈에 띄기 마련이고, 그런 여행자들을 대하는 다른 시선과 대우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거리를 걷는 모든 사람이 뉴욕 시민 같기도 했고, 공원에 앉은 모든 사람이 여행자 같기도 했다. 모두가 이방인인 도시라서 이방인을 향한 다른 시선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같은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뉴욕에서 나와 스친 사람들은 다들 'Sorry', 'Excuse'를 입에 달고 다녔다. 서로 부딪히거나 실례할 상황이 되면 당연히 미안하다고 하는 거지만 때로는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할 상황에서조차 반사적으로 미안하다고 했다.
사과라기보다 그냥 'Hi~' 대신에 'Sorry~'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보호가 과하다 싶을 만큼 철저했다. 붐비는 지하철을 타면 여기저기서 "쏘리쏘리"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오케이오케이"했다. 심지어 한참 동안 오지 않던 지하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오자 짜증이 아닌 박수를 쳐 나를 놀라게 했다.
이민자들의 도시에 살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곧 자신에 대한 보호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가 싶었다. 진화심리학에서 인간의 이타심을 진화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가설 중 하나는 '내가 이타심을 발휘하려는 상대방이 이타적 유전자를 갖고 있을 확률'에 대한 것이다. 이타심을 가진 개체가 증가한다면 나의 작은 희생이 사회적 안전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나와 내 자손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타심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겨우 보름을 지내고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가에 대한 우려는 늘 있다. 하지만 보름이 아니라 15년을 지내면 사회집단의 무의식을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법정 스님도 이해와 오해는 같은 말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보름간 내가 느끼고 이해하고 오해한 뉴욕은 여행자가 지내기에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나의 귀가 시간도 점점 늦어지고 있다. 물론 밝은 곳으로, 사람이 많은 곳으로, 큰 길로만, 안전하게 다니고 있다.
/ 글: 한성은(iamfallingup) 편집: 최은경(nuri78)
[타박타박 아홉걸음 세계일주 46] 뉴욕의 공공도서관과 브라이언트 파크
아무 걱정하지마 아무 생각하지마
아무 것도 아닌 걸 알게 될거야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도 괜찮아
아무 것도 아닌 걸 알게 될거야
- 펑크파인애플, 'I am okay' 노랫말 중에서
"나는 도서관을 만들고 싶습니다."
어른이 되고 난 후에도 나는 늘 꿈을 말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다.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없어요'이기 때문에, '선생님 꿈은 이거야'라고 내가 먼저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한다.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내 꿈이다. 게다가 배운 게 도둑질이고 직업이 그렇다보니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든 도서관이 근처에 있다면 항상 들른다. 공공 도서관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는 항상 내 관심사 중의 하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도서관은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시립 도서관이었다. 스톡홀름은 북유럽의 역사 때문인지 도착하기 전부터 그다지 정이 안 가는 곳이었다. 스톡홀름 구시가지에 있는 건물들도 예쁘다기 보다는 고압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이곳 맨해튼의 마천루가 그렇듯이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서 있는 그 고압적인 모습에 그다지 정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지도를 보고 찾아갔던 스톡홀름 시립 도서관에 들어섰을 때 나는 단순한 감동 이상의 큰 충격을 받았다. 도서관이 이럴 수도 있구나. 이런 도서관이 있는 곳이라면 오랫동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 하나가 그 도시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순간이었다. 이후로도 나는 스톡홀름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그 원형 도서관 서가를 마주했을 때 내 피부에 돋아났던 그 소름들이다.
뉴욕 공공 도서관은 스톡홀름처럼 압도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도서관 안에 겹겹이 쌓인 역사와 기품은 스톡홀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뉴욕 시립 도서관의 열람실에 들어서는 순간 열람실 특유의 밀도가 높은 무거운 공기가 긴 세월을 보낸 시간의 중후함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함마저 풍기고 있었다.
뉴욕의 매력에 푹 빠지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 비싼 물가,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교통체증, 하늘을 가린 고층 빌딩에 둘러 싸인 맨해튼에 사는 뉴요커들이 순식간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나 혼자만 알고 싶다는 쓸데 없는 욕심도 생겼고, 그럴싸한 도서관이 없는 호치민이 원망스러워졌다. 물론 직접 나서 찾아본 적이 없어서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1895년에 설립된 'NYPL'은 1911년에 준공된 현재의 뉴욕 공공 도서관 건물을 포함해서 인근 88개의 작은 도서관을 연계하고 4개의 학술센터를 운영하는 단체다. 이름이 'Public'이지만 주 정부가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NYPL'에서 공공 기금과 개인들의 기부금만으로 운영한다고 했다. 지난 100년 동안 이렇게 성장했으니 앞으로의 100년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갈지 도서관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눈여겨 보면 좋겠다.
특히 최근에는 공공 와이파이와 디지털 자료 확충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여전히 뉴욕 가정의 1/3은 인터넷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정보 격차를 줄이는 것이 당면 과제이기 때문이란다. 집에 인터넷이 안 되는 가정은 대체로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된 취약 계층이 대부분일 것이다. 핵심 과제가 그들의 정보 격차를 줄이는 것이라니, 나는 뉴욕의 이민자도 아닌데 그들의 의제 선정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뉴욕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도서관을 나온 뒤에 더 커졌다. 도서관 뒷편에는 브라이언트 파크(Bryant Park)가 있었다. 브라이언트 파크 역시 주 정부에서 운영하지 않고 공원 운영을 독립된 민간 재단에서 독자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공원과는 운영 방식도 다르고 이곳만의 색깔이 분명한 곳이었다. 일년 내내 다양한 축제와 공연이 이어지고 모든 공연은 전부 무료다. 센트럴 파크에 비하면 정말 작고 아담한 곳이지만 처음 이 공원에 왔을 때부터 오랜 친구를 맨해튼 한복판에서 만난 것처럼 반가웠고, 첫 만남에서 정이 들어버렸다.
맨해튼 사람들은 이렇게 지내는구나. 그들의 삶을 살짝 엿본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열려 있는 곳. 뉴욕에서는 드물게 깨끗한 공공 화장실이 있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 와이파이가 있고, 공원 곳곳에 전자기기를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도 있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사람들보다 더 많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잔디밭에 드러누우면 하늘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 브라이언트 파크였다. 인도 위를 걸을 때에도 고속도로 위의 자동차처럼 걷는 뉴요커들이 이곳에서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각자 준비한 도시락을 먹고 잔디를 베고 누워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 'I Love NY'란 문장을 대문짝만하게 가슴에다 새기고 다니는구나 싶었다.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어느 비오는 날의 일이었다. 공원을 걸으며 콘센트를 꽂을 만한 곳이 없는지 살펴 보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뉴욕 날씨는 정말 매일매일 종잡을 수가 없어서 갑자기 떨어지는 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서관 안으로 비를 피해 걸어가고 있는데 공원 테이블 위에 커다란 LCD 모니터를 놓고 유유히 신문을 읽고 있는 아저씨가 있었다. 까만 우산을 한손에 들고 노트북과 모니터를 연결한 후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남은 한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에서 디지털 노마드의 포스가 강렬하게 풍겼다. 브라이언트 파크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었다.
이후로 맨해튼에 나와서 시간이 남으면(여행자에게는 넘치는 게 시간이다) 언제나 브라이언트 파크와 뉴욕 공공 도서관을 찾았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은 몇 블럭을 걷더라도 항상 이곳에 와서 먹었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인들의 공연 소리를 들으며 공원 테이블에 앉아 있다. 뉴욕에서 매일매일 미술관에 가는 게 목표였는데 미술관에 안 가는 날에도 도서관에는 왔다.
마침 도서관 근처에 지하철 N 노선이 있어서 숙소가 있는 아스토리아까지 한번에 갈 수 있었다. 뉴욕 지하철은 24시간 운행이라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해가 뜨거운 한낮에는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있다가 폐관 시간이 되면 챙겨들고 나와서 공원에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Private'으로 둘러싸인 맨해튼 한가운데 있는 'Public'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고 있었다.
뉴욕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아이들이 우스갯소리로 "선생님, 뉴욕에 도착하면 총부터 사세요"라고 했다. 이미 NIE 수업시간에 미국의 총기사고에 대한 이야기와 대책에 대해 토론한 적도 있었다.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갖는 이미지가 나라고 뭐 달랐을까. 뉴욕 땅을 밟은 첫날 호스트 수잔 할머니에게도 질문을 했다.
"수잔, 밤에 혼자 다니면 위험해요?"
"(당황해하며) 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야. 밤 늦게 혼자 다니는 것이 완전하게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네가 사람들의 어깨를 일부러 치고 다니거나 욕을 하지 않는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아. 이 동네(아스토리아)에 살면서 위험하다고 느낀 적은 없어."
밤에 혼자 다니면 위험하냐고 묻다니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전세계 어디든 이방인인 여행자가 밤늦게 혼자 다니면 그건 항상 위험한 일이다.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면 그게 어느 나라가 됐든 주변에서 안전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는데 사실 한국이라고 해서 범죄의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한 대비와 경계는 언제 어디서든 꼭 필요한 것이다.
다만 겨우 보름이지만 지금까지 뉴욕에 지내면서 특별히 불쾌한 경험을 하지는 않았다. 나도 지금까지 꽤 많은 나라와 도시들을 다녀서 경험이 적다고 할 수는 없는데, 뉴욕은 그 중에서도 유난히 여행자의 존재감이 적었다.
여행자는 어디서든 어떤 식으로든 인파 속을 걸어도 눈에 띄기 마련이고, 그런 여행자들을 대하는 다른 시선과 대우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거리를 걷는 모든 사람이 뉴욕 시민 같기도 했고, 공원에 앉은 모든 사람이 여행자 같기도 했다. 모두가 이방인인 도시라서 이방인을 향한 다른 시선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같은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뉴욕에서 나와 스친 사람들은 다들 'Sorry', 'Excuse'를 입에 달고 다녔다. 서로 부딪히거나 실례할 상황이 되면 당연히 미안하다고 하는 거지만 때로는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할 상황에서조차 반사적으로 미안하다고 했다.
사과라기보다 그냥 'Hi~' 대신에 'Sorry~'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보호가 과하다 싶을 만큼 철저했다. 붐비는 지하철을 타면 여기저기서 "쏘리쏘리"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오케이오케이"했다. 심지어 한참 동안 오지 않던 지하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오자 짜증이 아닌 박수를 쳐 나를 놀라게 했다.
이민자들의 도시에 살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곧 자신에 대한 보호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가 싶었다. 진화심리학에서 인간의 이타심을 진화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가설 중 하나는 '내가 이타심을 발휘하려는 상대방이 이타적 유전자를 갖고 있을 확률'에 대한 것이다. 이타심을 가진 개체가 증가한다면 나의 작은 희생이 사회적 안전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나와 내 자손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타심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겨우 보름을 지내고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가에 대한 우려는 늘 있다. 하지만 보름이 아니라 15년을 지내면 사회집단의 무의식을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법정 스님도 이해와 오해는 같은 말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보름간 내가 느끼고 이해하고 오해한 뉴욕은 여행자가 지내기에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나의 귀가 시간도 점점 늦어지고 있다. 물론 밝은 곳으로, 사람이 많은 곳으로, 큰 길로만, 안전하게 다니고 있다.
/ 글: 한성은(iamfallingup) 편집: 최은경(nuri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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