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도서관 뉴스
[전국]함께 하는 경험, 사유로의 초대…‘불금’ 심야책방
매체명 : 한겨례
보도일 : 2018.07.01
함께 하는 경험, 사유로의 초대…‘불금’ 심야책방
6월 마지막 주 전국 77곳 첫 진행
저마다 개성·재미 넘치는 프로그램
이태원 ‘고요서사’ 시와 와인 나눠
공릉동 ‘지구불시착’에선 영화 감상
“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만날 때
책과 서점의 지속가능성 찾아질 것”
6월의 마지막 ‘불금’이던 지난 29일 늦은 밤. 서울 용산구 해방촌의 동네서점 ‘독립서사’의 작고 조용한 공간에 사람들이 나즈막히 돌아가며 낭송하는 시가 스며들었다. “분노의 씁쓸함 혹은 미숙함/ 4월의 대기층 쏟아지는 햇빛 속을 / 침 뱉고 이 갈며 이리저리 오가는/ 나는 하나의 아수라로다.”(‘봄과 아수라’ 중에서)
같은 시각,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북카페 ‘지구불시착’에선 열댓명의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한쪽 유리벽에 설치된 스크린에 빠져들었다.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한 여성의 끔찍한 비극과 위대한 모성을 그린 영화였다. “너희 이야기의 시작은 약속이란다.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 함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란다.”(영화 <그을린 사랑> 중에서)
이날 서울·광주·제주·인천·부산 등 전국 주요도시의 서점 77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름밤 문화의 향기에 젖어들었다. ‘2018 책의 해’를 맞아 조직위원회에서 6월부터 12월까지 매달 마지막주 금요일 밤에 개최하는 ‘심야책방’ 행사의 첫날이었다. 참가한 서점들은 심야의 원고청탁, 읽다 만 책 남에게 읽히기, 문학작품 속 음식 만들기, 작가와 막걸리 파티 등 저마다 재기발랄하고 개성 넘치는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진행했다.
‘고요서사’의 ‘심야책방’은 시와 와인으로 꾸려졌다. 와인 소믈리에 김승완씨는 “찬란한 봄이지만 마음은 아수라인 시인을 표현하기 위해, 봄처럼 젖은 흙냄새 향이 나면서 드라이하고 무게감이 있는 상반된 성격이 조화를 이룬 와인을 골라봤다”며 ‘하셀그로브 캣킨 쉬라즈’ 와인을 따라줬다. 한 참가자는 “후추 같은 스파이시한 향이 치고 올라오는 것이, 정상인처럼 살아가지만 마음속에 불쑥 올라오는 감정을 담은 시와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이 서점은 그동안 문학작품과 함께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함께 맛보는 ‘북스&코르크’를 여섯 차례 해왔고, 일곱번째 모임을 심야책방 날에 맞춰 열었다. 이날 다룬 작품은 일본 시인 미야자와 겐지의 시집 <봄과 아수라>. 겐지는 <은하철도 999>의 원작 동화인 <은하철도의 밤>을 쓴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어 겐지의 시 <영결의 아침>에 곁들여진 ‘산안토니오 스까이아 비앙코’는 한모금 머금으면 퍼지는 복숭아와 재스민 향으로 참가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이 나왔다. 10명이 참가한 이 날 모임은 밤 10시반께 끝났지만, 이후로도 와인과 대화를 나누다 자정이 되어서야 마무리됐다. 차경희 대표는 “그동안 모임엔 예산이 넉넉지 않아 와인을 가져오는데 여유가 없었는데, 오늘은 책의 해에서 일부 지원해주셔서 좀 더 괜찮은 와인을 참가자들께 내드릴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지구불시착’은 지난 3월부터 1~2주마다 ‘부끄러브’의 독서모임이 열리는데, 이날 심야책방은 영화 감상으로 대신했다. 참가자들은 독서모임 회원 뿐 아니라 이날 행사를 즐기려 처음 찾아온 이들도 여럿 있었다. 서울 남쪽 끝 관악구에 사는 회사원 우종현(26)씨는 서울 북쪽 끝 도봉구에 사는 동갑내기 여자 친구 강아무개씨를 만나러 먼 길을 왔는데, 우씨가 깜짝 제안한 데이트가 바로 강씨 집에서 멀지 않은 ‘지구불시착’의 심야책방 행사였다. 우씨는 “여친을 처음 만난 게 다른 독서모임에서였만큼 둘 다 책을 좋아해 제안했고 여친도 흔쾌히 동의했다”고 했다. 강씨는 “서점에서 꼭 책이 아니라 영화를 비롯해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건 동네책방 살리기 취지에도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택수 책방지기는 “지구불시착에 오는 분들은 누구나 처음엔 손님으로 ‘불시착’하지만,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대형 서점에는 없는 독립서점만의 매력을 느끼고 강한 유대감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지구불시착의 책모임 ‘부끄러브’도 그런 뜻을 담았다. 처음엔 서로 낯설지만 갈수록 책사랑(북러브)에 빠져드는 사랑방(북클럽)이 된다. 대학생 서창필씨는 “평소 소설 읽기를 좋아해 동네의 독립서점을 자주 찾았다”며 “사람들이 부담 없이 자유롭게 자기만의 글을 쓰고 작은 책으로까지 내는 걸 보고 나도 나만의 책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고 했다.
책모임 회원들은 즉석에서 글을 쓰고 컴퓨터 프린터로 인쇄해 글루건으로 접착·제본한 50~100쪽 분량의 손바닥책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만든 책은 동네 독립서점에서 유통된다. 작은 독립출판사를 운영하는 이대희(44)씨도 자신이 만든 책들을 몇몇 독립서점에 입고했던 인연으로 지구불시착에 ‘불시착’한 사례다. 그는 독립책방들 저마다 책읽기 뿐 아니라 책만들기, 드로잉(그림 그리기), 간단한 멜로디에 노랫말 짓기, 아기자기한 굿즈 만들기 등 개성 넘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즉석 경매가 이뤄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책의해 조직위는 “7~12월 심야책방 참여의사를 밝힌 서점은 120곳이 넘는다”며 “책이 매개가 되어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책과 서점의 지속 가능성도 자연스럽게 찾아질 수 있다”고 기대했다.
/ 조일준 김지훈 기자 iljun@hani.co.kr
6월 마지막 주 전국 77곳 첫 진행
저마다 개성·재미 넘치는 프로그램
이태원 ‘고요서사’ 시와 와인 나눠
공릉동 ‘지구불시착’에선 영화 감상
“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만날 때
책과 서점의 지속가능성 찾아질 것”
6월의 마지막 ‘불금’이던 지난 29일 늦은 밤. 서울 용산구 해방촌의 동네서점 ‘독립서사’의 작고 조용한 공간에 사람들이 나즈막히 돌아가며 낭송하는 시가 스며들었다. “분노의 씁쓸함 혹은 미숙함/ 4월의 대기층 쏟아지는 햇빛 속을 / 침 뱉고 이 갈며 이리저리 오가는/ 나는 하나의 아수라로다.”(‘봄과 아수라’ 중에서)
같은 시각,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북카페 ‘지구불시착’에선 열댓명의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한쪽 유리벽에 설치된 스크린에 빠져들었다.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한 여성의 끔찍한 비극과 위대한 모성을 그린 영화였다. “너희 이야기의 시작은 약속이란다.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 함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란다.”(영화 <그을린 사랑> 중에서)
이날 서울·광주·제주·인천·부산 등 전국 주요도시의 서점 77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름밤 문화의 향기에 젖어들었다. ‘2018 책의 해’를 맞아 조직위원회에서 6월부터 12월까지 매달 마지막주 금요일 밤에 개최하는 ‘심야책방’ 행사의 첫날이었다. 참가한 서점들은 심야의 원고청탁, 읽다 만 책 남에게 읽히기, 문학작품 속 음식 만들기, 작가와 막걸리 파티 등 저마다 재기발랄하고 개성 넘치는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진행했다.
‘고요서사’의 ‘심야책방’은 시와 와인으로 꾸려졌다. 와인 소믈리에 김승완씨는 “찬란한 봄이지만 마음은 아수라인 시인을 표현하기 위해, 봄처럼 젖은 흙냄새 향이 나면서 드라이하고 무게감이 있는 상반된 성격이 조화를 이룬 와인을 골라봤다”며 ‘하셀그로브 캣킨 쉬라즈’ 와인을 따라줬다. 한 참가자는 “후추 같은 스파이시한 향이 치고 올라오는 것이, 정상인처럼 살아가지만 마음속에 불쑥 올라오는 감정을 담은 시와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이 서점은 그동안 문학작품과 함께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함께 맛보는 ‘북스&코르크’를 여섯 차례 해왔고, 일곱번째 모임을 심야책방 날에 맞춰 열었다. 이날 다룬 작품은 일본 시인 미야자와 겐지의 시집 <봄과 아수라>. 겐지는 <은하철도 999>의 원작 동화인 <은하철도의 밤>을 쓴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어 겐지의 시 <영결의 아침>에 곁들여진 ‘산안토니오 스까이아 비앙코’는 한모금 머금으면 퍼지는 복숭아와 재스민 향으로 참가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이 나왔다. 10명이 참가한 이 날 모임은 밤 10시반께 끝났지만, 이후로도 와인과 대화를 나누다 자정이 되어서야 마무리됐다. 차경희 대표는 “그동안 모임엔 예산이 넉넉지 않아 와인을 가져오는데 여유가 없었는데, 오늘은 책의 해에서 일부 지원해주셔서 좀 더 괜찮은 와인을 참가자들께 내드릴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지구불시착’은 지난 3월부터 1~2주마다 ‘부끄러브’의 독서모임이 열리는데, 이날 심야책방은 영화 감상으로 대신했다. 참가자들은 독서모임 회원 뿐 아니라 이날 행사를 즐기려 처음 찾아온 이들도 여럿 있었다. 서울 남쪽 끝 관악구에 사는 회사원 우종현(26)씨는 서울 북쪽 끝 도봉구에 사는 동갑내기 여자 친구 강아무개씨를 만나러 먼 길을 왔는데, 우씨가 깜짝 제안한 데이트가 바로 강씨 집에서 멀지 않은 ‘지구불시착’의 심야책방 행사였다. 우씨는 “여친을 처음 만난 게 다른 독서모임에서였만큼 둘 다 책을 좋아해 제안했고 여친도 흔쾌히 동의했다”고 했다. 강씨는 “서점에서 꼭 책이 아니라 영화를 비롯해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건 동네책방 살리기 취지에도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택수 책방지기는 “지구불시착에 오는 분들은 누구나 처음엔 손님으로 ‘불시착’하지만,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대형 서점에는 없는 독립서점만의 매력을 느끼고 강한 유대감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지구불시착의 책모임 ‘부끄러브’도 그런 뜻을 담았다. 처음엔 서로 낯설지만 갈수록 책사랑(북러브)에 빠져드는 사랑방(북클럽)이 된다. 대학생 서창필씨는 “평소 소설 읽기를 좋아해 동네의 독립서점을 자주 찾았다”며 “사람들이 부담 없이 자유롭게 자기만의 글을 쓰고 작은 책으로까지 내는 걸 보고 나도 나만의 책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고 했다.
책모임 회원들은 즉석에서 글을 쓰고 컴퓨터 프린터로 인쇄해 글루건으로 접착·제본한 50~100쪽 분량의 손바닥책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만든 책은 동네 독립서점에서 유통된다. 작은 독립출판사를 운영하는 이대희(44)씨도 자신이 만든 책들을 몇몇 독립서점에 입고했던 인연으로 지구불시착에 ‘불시착’한 사례다. 그는 독립책방들 저마다 책읽기 뿐 아니라 책만들기, 드로잉(그림 그리기), 간단한 멜로디에 노랫말 짓기, 아기자기한 굿즈 만들기 등 개성 넘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즉석 경매가 이뤄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책의해 조직위는 “7~12월 심야책방 참여의사를 밝힌 서점은 120곳이 넘는다”며 “책이 매개가 되어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책과 서점의 지속 가능성도 자연스럽게 찾아질 수 있다”고 기대했다.
/ 조일준 김지훈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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