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마을 도서관에서

매체명 : 경향신문 보도일 : 201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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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212142325&code=990100
박수정/르포작가


3년 전, 바로 옆 동네에서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온 뒤였다. 갓 문을 연 마을 도서관을 찾아 길을 나섰다. 약도를 챙겼지만 소용없어 사람들한테 물어도 다들 도서관을 몰랐다.

동네 저 아래까지 내려가 도저히 도서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외진 찻길을 헤맸다. 지칠 무렵 접어든 골목, 언덕 맨 끝에 도서관이 있었다. 이름처럼 ‘하늘’이 쫙 펼쳐진 곳. 예전에 상업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라는데 학교에 딸린 3층 건물을 꾸며 만든 아담한 도서관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집에서 죽 가면 나오는 걸 나는 갈림길에서 계속 다른 길을 선택해 헛걸음을 했던 게다.

인연이 되어 그 도서관에서 아이와 어른들을 만나 함께 글을 쓴 지 몇 년이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도서관에 온 여자아이는 이제 6학년이 되었다. 말을 시키면 수줍게 웃기만 하던 아이가 여름 불볕더위에도, 겨울 폭설에도 몇 정거장 거리를 걸어 도서관에 나왔다. 중간에 학교 방과후수업으로 몇 달씩 못 나올 때가 있었는데 그 과정이 끝나면 꼭 다시 도서관에 나왔다. 그런 모습이 감동을 준다. 아이가 안 나오는 동안 함께 수업을 하던 친구들은 이따금 걔가 언제 오냐고 묻곤 했다. 함께한다는 건, 진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그리워하고 안부를 물어주고 오랜만에 나오면 어제 본 듯 그저 편하게 대해주는 거라고 아이들이 가르친다.

도서관에서 지난해 가을 첫 시낭송음악회를 했는데 두 번째 시낭송음악회를 올해 10월 한 토요일에 열었다. 지난해처럼, 고등학생일 때 도서관에 나와 어느덧 20대가 된 청년이 사회를 보았다. 전에는 시를 써서 전시할 시화까지 만들어놓고는 무대에는 결코 서지 않겠다고 빼던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이번엔 스스럼없이 시낭송을 하겠다고 나섰다.

1학년 여자아이는 언니 오빠들만 참여하려 했던 시낭송회에 혼자 시를 써서 녹음까지 해가며 집에서 연습했다며 찾아왔다. 함께 온 아이 아빠에게 도서관 서가에 꽂힌 <백석시전집>을 권해주었다. 그랬더니 그 한 권을 다 읽고는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뽑아 멋진 목소리로 주민들 앞에서 읊었다.

시낭송음악회 날 자원봉사 앞치마를 두르고 사람들에게 떡과 차를 나누어주던 엄마들이 잠시 앞치마를 벗어두고 무대에 올랐다.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를 맞이하는 아이들, 치매로 몇 년째 누워 있는 시어머니를 돌보느라 간혹 잊곤 해 미안한 배 속 셋째아이, 멀리 고향에서 아픈 다리와 희미해져가는 기억으로 올 추석에도 딸에게 줄 송편을 빚은 엄마,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고 무척 아파하던 아버지, 한평생 농사를 지었는데 이제 점점 기운과 기억을 잃어가는 시아버지, 10여년 전 낯선 이국땅에서 일했던 젊은 자신을 돌이키며 쓴 시들이 듣는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물결의 높이는 다르겠지만 각자 삶마다 일었거나 앞으로 일 격랑에 공감했다.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어느덧 이웃으로 살게 된 곳. 필리핀에서 온 영어 선생님은 호세 리살이 스페인어로 쓴 시 ‘마지막 인사’를 타갈로그어로, 한국에서 20년을 산 일본 여성은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의 동기라는 <은하철도의 밤>을 지은 미야자와 겐지가 쓴 ‘비에도 지지 않고’라는 시를 일본말로 들려주었다. 이때가 아니었다면 영 모르고 살거나 더 늦게 알았을 시인과 시를 만나는 기회가 되었다. 번역해 우리말로도 들었는데 한 중학생은 시 좋더라고 감상을 전한다.

마을 작은 도서관에서 연 시낭송음악회. 초등학생, 중학생부터 어른까지 한 서른 명이 시를 읽었다. 몇 년 전 청소년들한테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자 도서관에 왔다가 청소년들과 친구가 되어 두해째 시낭송회에서 시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해준 송경동·심보선 시인과 정혜윤 PD는 저녁 무렵 붉고 푸르게 물든 하늘을 주민들과 함께 바라보았다. 지난해에는 귤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이 올해는 다른 빛깔을 보여주었다.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가 어린이들은 어린이대로 어른들은 어른대로 삶에 허덕일 때 함께 본 노을빛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조명도 별다른 무대장치도 하지 않은 한 단짜리 작은 무대, 거기 서기까지 ‘할까 말까’ 갈등하던 학생과 어른들이 자기 이야기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려 낸 용기가, 사는 동안 무수히 만날 갈림길에서도 계속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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