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찬바람 쌩쌩 ‘임대-분양’ 이웃, 해빙의 합창

매체명 : 한국일보 보도일 : 201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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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1070008091022?did=NA&dtype=&dtypecode=
찬바람 쌩쌩 ‘임대-분양’ 이웃, 해빙의 합창

서로 다른 출입구로 드나들고 동(棟) 사이를 높은 담장으로 가로막은 아파트 단지. 산책로와 놀이터마저 편을 갈라 이용하고, 신경 써 들여다본다면 누구라도 간단히 임대아파트와 분양아파트를 구분할 수 있는 설계. 물리적 혼합에 그친 이른바 ‘소셜믹스(Social Mixㆍ임대와 분양주택 주민이 동일 단지에 거주하도록 한 방식)’의 현장만큼 파편사회의 뒤틀린 좌표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있을까. 임대주택 주민과 분양주택 주민의 이해관계가 부딪혀 곳곳에서 소송전이 벌어지고, 등을 맞대 경제 수준이라는 낙인을 박아 서로 헐뜯어온 아수라. 그동안 우리 사회는 소셜믹스라는 명목상 공동지대를 만들어놓고 방관했을 뿐, 계층 갈등의 상처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얼음장을 밀고 올라오는 봄눈처럼 반갑게 공감의 씨앗을 틔우는 곳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파편사회는 그렇게 미약하지만 한 걸음씩 공감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중일지 모른다.

서울 동북지역의 소셜믹스 아파트 단지 중 하나인 중랑구 신내동 우디안 아파트. 그러나 이곳에선 더 이상 주민들의 고성이 들리지 않는다. 서로 성내고 배척하며 상처 주던 말들은 사라지고 대신 화음이 흐른다. 임대주민과 분양주민 간 ‘진짜 공존’을 시도하기 위해 합창단(우디안 합창단)을 꾸린 주민들은 이제 꼬마장터와 여름캠프, 북페스티벌, 동아리 활동을 벌이며 공존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 주민들은 “우리 동네엔 (임대아파트 주민과 분양아파트 주민간)계층 갈등이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우디안 아파트에 계층 갈등이 사라진 비결은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으려는 배려에 있다. 우디안 아파트도 여느 혼합단지(소셜믹스)처럼 같은 동에 분양주택과 임대주택이 섞여 있다. 1단지 분양 615가구, 임대 787가구, 2단지 분양 720가구, 임대 1,176가구가 함께 거주한다. 임대동을 따로 짓거나 임대주택을 저층부에 몰아넣는 형태는 재건축 단계에서 사업승인을 받지 못하면서 동 분리는 사라지고 있지만, 같은 동에 섞어 놔도 마음만 먹으면 어느 라인이 임대주택인지 금세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디안 합창단은 ‘진짜 공존’을 위해 구태여 참여를 원하는 주민의 주소를 묻지 않고 있다. 최정희 우디안 합창단장은 “합창단원을 모집할 때 ‘1, 2단지 주민’이라는 지원자격만 뒀다”라며 “경제력에 따른 위화감을 없애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단지 사정을 잘 아는 분들은 거주하는 라인으로도 임대주택과 분양주택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다른 혼합단지처럼 파열음을 내기 전에 주민들이 함께 화음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 합창단 가입 때 호수를 빼고 동만 적도록 했어요.”

2015년 10월 첫발을 뗀 합창단은 해마다 단지 내 행사에서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30~80대까지 15명이 모인 ‘우디안 합창단’과 20여명이 노래하는 어린이합창단 ‘우디 엔젤스콰이어’는 매월 한 차례 연습실에 모여 새로운 곡을 연습한다. 시공사인 SH공사가 임대와 분양 혼합단지의 성공적 안착을 위해 지휘자 비용을 후원하던 3년간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다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아파트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연습을 이어가고 있다.

합창단으로 시작된 진짜 공존 실험은 이제 단지 곳곳에서 발견된다. 봄에는 어른들의 벼룩시장인 ‘우아한 마켓’이 열린다. ‘우디안(우) 아름답게(아) 하나(한)되자’는 의미에서 앞글자를 땄다. 지난해 일곱 번째 열린 장터에선 우디안 합창단이 오프닝 공연으로 ‘이렇게 좋은 날’과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합창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지난달 22일에는 단지 내 작은 도서관에서 ‘꼬마장터’가 열렸다. 아이들이 부모의 경제력 차이에 따른 편견을 형성하지 않고 어울리도록 벼룩시장 물품 모집과 판매에 참여하도록 했다.

임대, 분양주택 주민들이 고루 참여하는 동아리가 활성화된 점도 눈에 띈다. 골프, 볼링, 농구, 야구단 같은 스포츠 모임부터 중국어와 바느질, 독서모임 등 6~10명 단위의 소그룹이 여럿 운영된다. 임대주택 초기입주자인 이경희(가명ㆍ37)씨는 “4년 전 입주할 땐 공동행사에 참여를 안 해서 몰랐는데 2년 전부터 도서관 활동을 해보니 (임대주택과 분양주택 간) 구분이 없고 이웃들과 소통할 기회가 많다”고 전했다.

이런 노력 끝에 2단지는 2015년 서울시가 선정한 ‘공동체 활성화 우수 단지’에 올랐다. 계층갈등을 없애기 위해 시작한 노력이 아파트 문화라는 결실을 맺었다. 분양주택 주민인 이다영(가명ㆍ45)씨는 여러 소통의 장(場)이 공동체 문화 조성에 큰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옛날에는 엄마들이 우물가 빨래터에서 자주 만났는데 요즘 아파트는 반상회도 잘 안 하잖아요. 이 단지는 집 앞 도서관에서 여러 행사를 하니 친해질 기회가 많아요.”

기존 주민들이 앞장서 공존 문화를 만드니 새로 이사 온 주민들도 자연스럽게 조화된다. “이사오기 전엔 은평뉴타운 소셜믹스 아파트에서 장기전세로 살았는데 분양받아 이사 왔으니 (임대-분양) 구분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대부분 생각이 비슷해서 그런 말을 꺼내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문화예요.”

그렇다고 무작정 어느 한쪽 목소리에 맞추는 것은 아니다. 임대주택과 분양주택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철저히 존중한다. 이를 위해 입주자대표회의를 임대주택 회의와 분양주택 회의 두 갈래로 운영하고 공동으로 결정할 일만 공동회의에서 한다. 덕분에 의사결정 과정에서 크게 문제된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임대와 분양주택 주민들이 다단방식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이 소셜믹스 단지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고 분석한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주민 간 이해관계가 달라 갈등이 지속된다”라며 “이해관계가 다른 부분은 각자 의논하고, 공동으로 머리를 맞댈 부분만 함께 논의하는 편이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최근 임대주택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한 혼합단지에서 분양주택 입주자들 중심의 의사결정이 이뤄졌다며 고소로 이어진 사건이 회자됐다. “함께 사는 공간에서 분양세대를 우선시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소송전으로 비화한 것이다.

“처음부터 혼합단지라는 사실을 알고 입주했더라도 집주인과 세입자의 이해관계가 달라 미묘한 갈등이 발생합니다. 임대주택 주민은 세입자로서 당장 지출을 최소화하려 하지만, 분양주택의 소유주는 장기적으로 부동산의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다면 비용이 들더라도 감수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각 주민이 의견을 내고 이를 반영하는 것이 진짜 공존의 첫걸음입니다.”

/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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